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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3일 수요일

집행인의 귀향: 매체-인공지능-주체, 디지털 존재론

[김상우의 과학・소설 읽기] 집행인의 귀향: 매체-인공지능-주체, 디지털 존재론_1부

Voice 2013/10/01 19:47                                                                            http://aliceon.tistory.com/2214

로봇은 입력된 프로그램을 따라 특정한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야. 행맨이 로봇과 다른 건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점이지…단지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기계가 아니었던 거지. 

1. 생체정보를 포함해 모든 게 전산화된 미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존재다. 자신의 의지로 네트의 세계에서 적극적인 망명자가 된 탓이다. “당시 나는 어떤 결단을 내렸고, 전자적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2차적인 세계의 시민권을 자동으로 받는 일이 없도록 미리 조치했다.” 그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원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 대규모 전산화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알던 사람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망명자 신세 덕분에 기묘하게 현실과 통하게 된다. “특수하고 민감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어떤 인간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매우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카드로 치면 조커 같은 패라고 할까. 미묘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노릇을 하면 살아간다. 전자적 망명자라는 위치는 안성맞춤이었다. 망명자라도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돈 역시 문제가 생기면 비합법의 존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2. 여느 때와 똑같이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술집에서 우연히 돈을 만났다. 그는 대형 사립탐정 사무소의 대표였고, 때때로 그를 고용했던 사람이었다. 돈은 사건을 직접 꺼내지 않고, 그의 과거와 지식을 넌지시 언급하며 외계행성 탐사계획을 그에게 탐문한다. 그는 금성 탐사계획을 설명하면서, 흥미로운 기계를 언급한다. 이른바 텔레팩터telefactor. 그것은 로봇일까. 아니다. 로봇은 사전에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나, 텔레팩터는 그 같은 프로그램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운용되는 것일까. 멀리서 원격으로 사람이 조종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원격으로 조종가능한 전자적 ‘기계갑옷’에 가까우며, 인간의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한다. 일종의 ‘매체’로 볼만한 것이다. 여기서 통제자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멀리 떨어진 채로 텔레팩터와 ‘교감’하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가 경험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텔레팩터는 약점이 명확했다. 서로가 피드백하는 과정에서 시간적 ‘간격’이 발생한다는 것. 탐사과정에서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사소한 변화라도 발생하면 제대로 대처하기 무척 힘들 수밖에 없다. 물론, 행성의 여러 가지 환경자료를 축적하면서 예측모형을 정교하게 만드는 식으로 보완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존재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생각했다. 멀리서 교신하느니, 아예 정신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여기서 인공지능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덤으로 인간의 정체성까지.) 

3. ‘인공지능’은 현대과학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분야다. 알다시피 인공지능은 20세기 초 두 명의 과학자의 공이 컸다. 튜링이 인공지능 모형을 추상적으로 고안했다면, 폰 노이만은 인공지능을 실제로 구현하는 현대적 컴퓨터모형을 설계했다. 적어도 계산만큼은 기술적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게 되었고,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기계에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튜링의 생각은 간단했다. 두 개의 방이 있는데 한쪽에는 사람이 한쪽에는 인공지능 기계가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튜링의 답변도 간단했다. 사람들이 질문하고 대화를 하면서, 사람과 기계를 분별하지 못하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구현도 됐다는 점이다.(1966년 요제프 바이첸바움Joseph Weizenbaum은 인공지능 상담사 엘리자를 만들어 병원에 설치해 놓았고, 환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끌었다고 한다) 튜링이 구상을 담당했다면, 실현은 폰 노이만의 몫이었다. 중앙처리장치, 메모리, 저장장치, 입출력장치 등, 기술적 수준에서 한계가 있었을 뿐, 현대의 컴퓨터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이 고전적 컴퓨터는 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맨해튼계획에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이때부터였다. 오랫동안 정신의 영역을 독점했던 철학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은.   

4. 사실 징후는 일찌감치 나타났다. 근대철학의 기틀을 완성한 칸트는 철학의 편제를 주체를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서, 이 때문에 실재reality는 인식의 효과 정도로 전락했다. 물론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식과 실재는 동일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둘은 서로 대응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하계 때문에 직접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식으로 인식의 실마리를 마련한 셈이었다. 철학사의 측면에서 칸트의 해결책은 관념론의 발판으로 작용했고, 이후 유구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정신을 설명할 때 언제나 유물론의 대척점에 섰다. 인간은 단순한 화합물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이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을 필요이상으로 논쟁적으로 받아들이는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부분적으로는 의미론semantics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에는 온갖 종류의 비물질적인 연상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단순한 용어의 문제라는 것. 인간을 설명할 때 ‘정신’이나 ‘지능’ 같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제 5원소 에테르처럼 말이다. 화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기까지 장장 2천년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없애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랬기 때문에 주인공은 행맨의 문제를 오작동으로 생각한다. “너무 복잡했다고나 할까. 아마 그래서 고장났다고 생각하네.” 고장난 기계나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진정한 창조주가   없거든단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재배열할 뿐이야오로지 신만이 창조할  있지.”

5. 주인공은 ‘고장  기계’를 수선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선다돈에게 의뢰한 사람은 정치가로 변신한 브록덴그가 의뢰한 내용은단순했다행맨이 프로젝트 관련자들을 찾아내 복수하고 있는  같으니진상을 파헤쳐 달라는 것이었다외계에서 돌아온 흔적도발견됐고사업가로 변신한 번즈도 살해됐기 때문에 혐의는 더욱 짙었다사건의 진상을 확인하려면행맨프로젝트 관련자들을 탐문하는  순서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번째 대상으로 정신과 전문의 레일라를 찾아간다레일라는 브록덴과 의견이 달랐다브록덴의 생각은 망상이며행맨의 복수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무엇보다 그녀는 행맨의 정체성을 의심한다원래 행맨프로젝트는 텔레팩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다원격으로 조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시차는 예측모형을 아무리 정교하게 구성해도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면인격에 준하는 무엇인가를 텔레팩터에 설정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있지않을까인공지능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했고 명의 내노라 하는 전문가들이 달려들었다레일라는 행맨이 성장하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인격’ 비슷한 것이 형성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그러나인간과 접촉하며 학습했다고 해도본시 인공지능인 까닭에 정확히 인격이라고 보기도 어려우며실제 그렇다고 하더라도  명의 인격이 하나로 융합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나는 행맨이 인간의 간질발작에 해당하는 것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받았어요그런 식의 통제불가능한 전류가 전자기적 물질내부를 흘렀다면사실상 마음을 지워버리는 효과를 가져왔을 거예요본인 입장에서는 죽거나 백치가 되는 것과 다름없는 현상이 일어났던 거죠.”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행맨이 망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결국은 교신이 끊어진 것도일종의 정신분열증에 빠진 결과라는 얘기다.

6. 주인공은 여기서 이상한 낌새를 맡는다브록덴도 그렇고 레일라도 그렇고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단순히 고장난것에 불과하다면브록덴은 행맨이 무슨 이유 때문에 복수를 하는 것일까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행맨은 심적으로 엄청난 갈등을 경험한 뒤에드디어 그것들을 통제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완전한 자율성을 획득했다는 뜻입니다행맨은 그때까지 자기마음을 갈가리 찢고 있던 악마 4인조를 제압했고 과정에서  모든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에 대한 전폭적인 증오를 획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브록덴이 의뢰한 시기를 생각하면 (말은  했지만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읽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바늘로 찔러도   방울    같은 레일라는 인문학의 깜찍한 소설이라며그녀는 깐깐하게 반응한다그녀의 반론도 단순했다.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면 자멸했을 거고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면 복수는 불가능해진다는뜻이에요.” 실패한 자아는 복수를 꿈꿀 여지조차 없으며완성된 자아는 복수를 꿈조차 꾸지 않는다는 것이다어디  군데  틈을 찾기 힘든 반론이었다하지만걸리는  없지는 않았다레일라는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관련자 펜트리스를 찾아가 봤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종교적 망상에 빠져서 원래의 명민함까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창조한 존재가 광기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식으로따라서 그런 우리에게 천벌을 내리려고 돌아온 것은 정당한 심판이라고 느끼는  같더군요.” 

7. 신의 영역을 침범한 광기에 사로 잡힌 과학자mad scientist 과학소설에서 매우 익숙한 소재요 인물이나 때문에 도덕적 번민에 휩싸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심판 과학자와 가장 거리가  개념이 아닌가이러한 난제 외에도 주인공은 거북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전에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얼마간 호감을 느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게다가 펜트리스는 기묘한 과학자였다과학자면서도 유사신학자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었다그래도  정도까지는아니었는데행맨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펜트리스는 전보다 진후가 심해진 상태였다게다가 그는 몸소 사건을 해결하겠다고말하기까지 하였다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주인공은 펜트리스와 유사신학적 논쟁을 벌이며혼자서 해결하려는 펜트리스를 압박한다핸맨이 복수의 천사라면 그에 맞서는 행위 역시 불경한 짓이며펜트리스의 생각이 틀렸다면 중요한 정보를 은폐함으로써 다른 관련자까지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펜트리는 자기가 실패하면 신의 뜻이라고 눙치고 넘어가지만노련한 주인공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 전지전능한 신조차도 사람이 죽은 뒤에야 심판을 내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말이죠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이 언급한 교만함에  하나의 제목이 추가되는  아닐까요?” 펜트리스가 교만한 인간을 비난하던내용을 근거로 그의 부덕을 공격한 셈이었다이렇게 하여어느덧 ‘행맨 인공지능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정신분열증이라는 심리학의 문제를 거쳐 심판이라는 신학의 문제로 탈바꿈된다그리고 심판은 실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주인공이 떠난 얼마  펜트리를 시작으로 곧바로 레일라까지 살해됐던 것이다이제 남은 사람은 상원의원 브록덴뿐이었고상황은 급박해진다.

2014년 8월 7일 목요일

전원시와 광시곡- 농민학에서 본 중국의 역사와 현실사회 비판, 친후이·쑤원


전원시와 광시곡>
전원시와 광시곡- 농민학에서 본 중국의 역사와 현실사회 비판
친후이·쑤원 지음 / 유용태 옮김
2000년 4월 11일 발행 / 463쪽 / 값 25,000원
*문화관광부 2000년 우수학술도서
문화대혁명 때 농촌에 하방되어 9년간 농민이었던 지은이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혁명의 사회역사적 원인과 오늘날 중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실증적으로 치밀하게 파헤친 자기성찰적 연구서.    

● 저역자 소개 

친후이·쑤원(秦暉·蘇文)
친후이는 1953년 중국 광시(廣西) 성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아버지가 지식분자라는 이유로 농촌에 하방되어 9년간 농사를 지었다. 란저우(蘭州) 대학의 대학원에서 중국경제사와 사회사를 전공한 후 산시사범대학(陝西師範大學)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밭가는 자의 말: 농민학 문집>, <문제와 주의: 친후이 문선> 등이 있다.
쑤원은 195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태어났다. 란저우 대학 외국어학과(러시아어 전공)와 대학원 역사학과(소련·동유럽사 전공)를 졸업한 후 산시사범대학 역사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친후이의 부인이며,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편역국(中央編譯局) 세계사회주의연구소 러시아연구센터 연구원이다. 저서로 <농촌코뮌, 개혁과 혁명> 등이 있다.
옮긴이 유용태 
1957년 서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동양사학과(석사)와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박사)에서 중국현대사를 전공하였다. 중국 난징 대학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대중국의 농민운동과 직업대표제의 모색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편역서 <농민운동 조직론>과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사>가 있다.

"양개문혁설": 문혁연구의 전개

http://m.blog.daum.net/shanghaicrab/16154529

글: 서우어(徐友漁)

중국인들 가운데 그 당시 문혁연구로 가장 유명한 대표인물은 먼저 양샤오카이(楊小凱) 즉, 양시광(楊曦光)를 꼽을 수 있다. 그외에 정이, 류궈카이, 왕샤오광(王紹光)등이 있다. 왕샤오광은 현재 홍콩 중문대학 정치학과의 주임이다. 양시광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양개문혁론"과 사회충돌온의 중국쪽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중국인들 가운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공인되었었다. 그의 경력은 아주 전설적이다. 그의 부친은 문혁전의 후난성위 비서장이자 원래 노혁명가였으며, 나중에 펑더화이, 장원텐 여산회의의 형향을 받아, '펑더화이분자'로까지 낙인찍히지는 않았지만, 우경으로 분류되어 당내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혁명참가자들 중에는 중용되거나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은 아니다. 양샤오카이는 그 자신도 문화대혁명에 깊이 빠져들었고, 문혁가운데 많은 조사를 한다.

양샤오카이는 문화대혁명때 아주 유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왕시저가 <사회주의의 민주와 법제를 논함>이라는 글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1968년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글을 써서, 중국의 각 계층을 분석하고, 중국의 미래사회가 어떻게 변혁해야할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을 한다. 그는 이 글 때문에 반혁명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운이 좋았다. 그가 감옥에 갇힌지 10년동안 그는 중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10년간 다닌 셈이 된다. 당시 중국의 대학은 모조리 문을 닫았고, 일반인들은 10년간을 허송세월해야 했고, 10년간 학업을 내팽개치게 된다. 그러나 양샤오카이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그 자신이 정치범이고, 정치감 감옥안에는 후난에서 당시 가장 학문이 깊고, 가장 사상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영어, 수학, 기계를 배웠다. 그래서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쯤에 그는 이미 상당히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사회과학원이 그를 모셔가고, 나중에 미국유학까지 떠난다. 그는 금방 아주 유명한 경제학자가 된다. 나중에 모두 가장 큰 손실로 여기는 것은 그가 몇년만 더 살았더라면 노벨경제학상을 탔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스크레일리아의 모나시대학에 있을 때, 그 학교의 사람이 그를 노벨상을 받은 사람으로 대우해주었다. 그에게 지위나 경비를 모두 아주 높게 책정해주었었다.

그는 명망이 아주 높았고, 많은 글을 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때 비판받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이다. 그는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계속 연구하고, <우귀사신록>이라는 아주 좋은 책을 쓴다. 여기서 그는 문화대혁명10년을 논하고, 감옥안에서 공부한 상황, 영어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고, 물리를 배우고 뭐든지 배웠던 것을 얘기한다. 사회충돌론에 관하여, 양시광은 일련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해다. 문화대혁명의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각적으로 혹은 비자각적으로 3가지 이론틀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권력투쟁설이라는 것으로, 중공지도자들이 정치권력을 쟁탈하는 것은 메인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을 분석하는 것인데, 서방에서는 이 분야의 주장이 가장 많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는 이를 적나라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펴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하여는 공식적으로 하는 말대로 하는 것이지, 모택동과 유소기가 적나라하게 권력투쟁을 벌였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학설로까지 주장된 경우는 많지 않다. 권력투쟁으로 문화대혁명을 해석하는 것은 서방학자들이 가장 많다. 그들은 문화라는 것은 헛소리이고 근본적으로 문화같은 건 없었다고 말한다. 문화대혁명은 문화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화혁명(武化革命)"이라고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두 총과 탱크로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굳이 "문화"대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택동의 잘못을 덮어주려는 시도라고 본다. 이런 이론은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권력투쟁이 어떤지를 분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양시광은 문화대혁명의 이론을 3가지로 분석하여 첫째는 권력투쟁설, 둘째는 중국관방의 계급투쟁설 혹은 노선투쟁설, 혹은 양개사령부라는 주장인데, 이는 문화대혁명에서 관방의 견해이다. 예를 들어, 모택동, 강청같은 문혁파들은 모두 이런 주장을 펼쳤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것은 수정주의노선과 혁명노선간에 진행된 투쟁이고 노선투쟁이라는 것이다. 문혁이후의 등소평, 진운도 노선투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단지 옳고 그른 문제에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문화대혁명때 모주석을 대표로 하는 혁명노선과 유소기를 대표로 하는 수정주의노선간에.

종합적으로 말해서, 문화혁명이 발생한 것은 노선이 다르기 때문이고, 노선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문혁을 부정하는 등소평의 일파도 노선투쟁설에 동의한다. 다만 정확한 노선은 유소기의 노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립할 수 있는 면이 많다. 예를 들어 현재 얘기하는 신민주주의, 유소기는 신민주주의를 견지할 것을 주장했다. 모택동은 불만을 가지고, 배신한다. 자신의 장엄한 약속인 신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극좌의 노선을 걷는다. 지나치게 일찌감치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한 것이다. 이것도 노선투쟁설이다. 단지 이전의 문화혁명이 정확하다고 보는 것에서 틀렸다고 보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문화대혁명때 비판받는 측이 정확한 측이라고 바뀐 것일 뿐이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의 두번째 이론적인 틀이다. 노선투쟁설로 불리는 것이다.

마지막 한가지는 양샤오카이를 대표로 하고 중국인들 가운데서 제기된 것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서방학자들이 일찌감치 제기하였던 사회충돌설이다. 양샤오카이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관점은 이렇게 본다. 문화대혁명은 상층의 권력투쟁일 뿐아니라, 중국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익집단, 계층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말려든 홍위병과 각양각색의 군중조식은 간단하게 모주석과 기타 중곡지도자의 정치투쟁의 도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기만당했을 뿐아니라,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의지도 있다. 그들은 문화혁명때 잠시 있었던 대민주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문화혁명에서 군중의 이익은 집중적으로 현재 조반파(造反派)의 정치강령내에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관료특권계층을 타도하고자 했다. 도 다른 보수파는 기존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들 쌍방의 투쟁은 문화대혁명에서 군중투쟁의 주요내용이 된다. 동시에 문화대혁명의 전체 경과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충돌론이다.

기실 양샤오카이보다 먼저 정식으로 이런 이론을 제출한 것은 문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 양샤오카이는 전문적으로 문혁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주로 경제를 연구한다. 그런 사람은 바로 아니카 천이다. 그녀는 중국혈통이어서 연구하기에 편리했다. 그녀는 말했다. 1966-1969년의 문혁은 반관료운동이라고(이런 관점은 현재 중국백성들 사이에 시장이 아주 크다), 그녀는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했을 때, 조반파는 모택동이 제출한 구호와 이상에 고무되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군중을 해방시켜야 하고, 군중을 존중해야 하며, 우리는 무산계급혁명노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군중노선이라고 하였다. 유소기의 노선은 국민당의 훈정노선이라는 것이다. 군중을 아두(阿斗)로 취급하고 자신을 제갈량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반파는 당초에 이런 것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문화대혁명에 가담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첫 몇년동안 중앙문혁의 조종을 받았고, 모주석을 옹호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은 즉시 이 점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들은 독립한 정치강령과 정치계획을 지닌 한 무리의 역량이었다.양샤오카이는 더욱 앞서서 주장했다(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군중조직을 준정당(準政黨)으로 보았다. 그는 정당이라고까지 말하기는 곤란했을 것이어서 그저 준정당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모주석이 말한 군중동원수법을 "모주석이 자유결사라는 패를 들고 나왔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의 생각으로 조금 지나친 점이 있다. 양샤오카이의 주장대로라면, 1966-1969년 모택동은 유소기를 타도하기 위하여 자유결사와 언론자유라는 패를 들고 나왔다는 말이 되는데, 그때 중국은 중국공산당통치역사상 드물게 볼 수 있는 때였고, 예외적으로 결사자유와 언론자유가 있던 시기이다. 그때는 신문을 만들고, 언론에 발표하는 것이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발표할 수 있었다. 결사자유라는 것은 인민군중이 조직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필자는 양샤오카이의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너무 과장했다. 실제로는 제한과 규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공안육조>가 있었다. 여하한 언론도 모주석, 임표를 공격하면 군중은 즉시 무산계급전정기관으로 보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으로 양샤오카이는 좀 지나친 점이 있다. 다만 그의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주 재미있다. 이런 주장은 현재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화대혁명을 인민군중이 보기드물게 민주와 자유를 구가한 자유시대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양샤오카이는 바로 현대정치학의 술어를 가지고 그당시 실제로 결사자유와 언론자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양샤오카이는 문화대혁명때 적극적으로 조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시민들 중에서 공산당의 통치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1966-1968년의 2년간, 모택동이 하나의 명령을 내리는데, 군대이외에 모든 공산당의 조직활동은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정부에 등록하면 자신의 정치조직을 성립할 수 있었다. 모주석은 일반민중의 공산당체제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유소기, 등소평이 시민들에게 진행한 정치적 박해(공작조파견등)를 이용하여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조반운동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때의 운동은 진정한 조반이었다고. 중국공산당의 관료가 17년동안 한 일은 모두 민중에게 청산된다고. 당시의 중국은 1966-1968년, 약 2,3년의 기간동안 진정한 노동자운동이 발생하였고, 진정한 학생운동이 발생하였고, 진정한 시민운동이 발생하였다고. 표면적으로 모두 모주석의 말을 듣고, 혁명조반을 하지만 이 운동은 실질적으로 극우적인 것이었다고. 왜 극우적인 것인가? 표면적으로 모주석을 따라서 조반한 것이지만 실제로 진공한 것은 당의 조직이고, 그들이 고치고자 한 것은 당의 영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조반운동의 실질은 극우이다.

한 사람이 아주 날카롭게 말했다. 양샤오카이와 비슷하다. 프랑스에 문화혁명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화린산(華林山)이라고 부른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국적을 취득하고, 프랑스부인을 얻었다. 그는 당초에 광동의 가장 유명한 홍기파(紅旗派)의 조반파구성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문화대혁명의 조반파는 중국공산당을 뒤집어엎으려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이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와 논전을 전개한 바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를 심하게 비판했다. 최소한 이런 주장은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다만 동시에 필자의 비교적 학술적인 언어로 얘기하자면 부분적으로 사실적 근거가 있다. 해외에서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주장은 완전히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정도와 규모를 어느 정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그들의 주장은 일부 사실적 근거가 있다.

또 다른 입장은 아주 정통적이고 관방적인 사람의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그를 신좌파(新左派)라 부른다. 이름은 왕샤오광이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논문은 문화대혁명때의 군중운동에 관한 것이다. 그의 박사논문의 중문본과 영문본은 모두 간행되었다. 그는 사회충돌론의 아주 중요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학술적으로 왜 문화대혁명이 사회충돌이지 사람들 모두가 기만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했다.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서 모주석을 옹호한 것이고, 모주석의 주장에 호응하여 문화대혁명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각도에서 논증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자주적이고 모주석의 명령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 증거는 어떤 것인가? 바로 그는 모주석이 여러가지 말을 인용했다. 모주석은 문화해혁명을 3개월간 진행한 이후, 문화대혁명은 보기에 6개월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6개월이 지난 후에는 다시 2,3년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2,3년을 하고난 후에도 모주석은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과 10년이 지나도 끝나지가 않았다. 왕샤오광은 이런 논단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일정표는 계속 폐기되었고, 계속 중단되었다. 이것은 무슨 문제를 설명하는가?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의 진전을 장악하고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택동은 아예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문화대혁명의 진전은 모택동을 밀고 갔고, 모택동은 군중운동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영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쥐락펴락하면서 철저히 통제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택동은 운동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지 않으면 2개월이 안되고 다시 6개월, 6개월이 안되자 다시 2,3년, 2,3년이 안되자 10년동안 다시 한 것은 설명할 수가 없다. 군중운동이라는 마귀가 호리병에서 나온 후에는 모택동도 수습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그저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그래서 왕샤오광은 말한다. 이런 사정은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그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한다. 오히려 그가 그 자신이 일으킨 운동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문혁의 최대희생자가 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왕샤오광의 관점이다.

이런 "양개문혁"의 주장은 토론이 가장 집중되고 가장 오래된 문제이다. 이런 토론은 문화대혁명 30주년까지 계속 된다. 1996년, "양개문혁록"에 관한 논쟁이 그해 문화대혁명발동30주년기념의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된다. 2006년이 되어 문화대혁명발동40주년을 기념할 때도 가장 중요한 이슈의 하나가 되었다. 류궈카이가 2006년 문혁40주년기념회에서 아주 중요한 논문을 하나 발표한다. <인민의 문혁을 논함 - 문혁40주년을 위하여 씀>이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수단이고, 목적은 중앙과 그와 의견이 다른 성시의 사람들을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모택동의 관방문혁의 첫번째 주장은 문혁숙청이다. 모택동은 유소기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람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문화혁명에서 군대와 권력을 장악한 문관이 혁명군중을 극히 잔혹하게 진압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방문혁은 문혁숙청이외에 또 하나의 내용을 가지는데 바로 문혁진압이다. 다만, 또 다른 방면에서, 모두 보지 못한 것은 광대한 인민군중이 정치적 차별에 반대하고, 정치박해에 반대하는 것이다. 군중들이 자신의 생존권리를 쟁취하려는 운동을 문혁반항이라고 부른다. 문혁반항은 바로 "인민문혁"의 내용이다. 이런 관점은 2009년에 발표되었을 때, 대륙에서도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류쯔리(劉自力)이다. 그는 중앙선전부 간부의 자제라고 한다. 이론사고가 아주 많았다. 현재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 반대했다. "양개문혁설"에서, 문혁중 조반파에 대한 인식과 평가와 관련이 있다. 중요하면서도 극단적인 하나의 관점은 문혁중 조반파를 정의를 대표하는 역량으로 보는 것이다. 왜먀하면 인민군중이 탄압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문혁전의 17년간 관료계급, 특권계급의 압박을 받았고,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고,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하였으므로 그들이 문화대혁명의 기회를 이용하여 특권에 반항하고 관료에 반항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양개문혁설"은 조반파에 대한 평가에 관련된다. 이 방면에서, 2006년에 책이 한권 나온다. 쓰촨성이 저우룬줘(周倫佐)가 쓴 것으로 <문혁조반파의 진상>이라는 글이다. 즉, 문화대혁명의 조반파는 등소평이 "삼종인(三種人)"으로 규정되었는데, "머리에는 긴 뿔이 나 있고, 몸에는 긴 가시가 나 있고, 좋은 마음을 품지 않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정파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들은 핍박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신의 이익쟁취를 위하여 투쟁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여러가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두 가지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나 자신에게도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이 논쟁에 참가했고, 하나의 관점을 대표했다. 당초 필자는 기본적으로 "양개문혁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필자는 천후이(秦暉)가 나의 관점에 대하여 별로라고 생각한다고 느꼈다. 천후이의 견해는 "양개문혁"은 없다는 명확한 것이었다. 약간은 "인민문혁"설에 치우친 것이었다. 나 자신은 문혁을 아주 상세히 연구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그것을 그러나 필자는 모택동의 문혁이 없으면 배후의 조반파의 활동공간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민의 문혁"은 기본적으로 모택동문혁의 파생물,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학자로서 연구하며 통계적 의미에서, 관련된 사람의 수에서 보면, 그것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양개문혁론"의 이론에서 말하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진정으로 반관료, 반특권을 한 사람은 우리가 말하는 또 다른 이야기(즉 우리가 말하는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운동은 바로 '오대영수'이다. 당초의 혈통론을 얘기하고, 괴대부와 같은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다)에 관련된 사람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인원수나 역량이 너무나 적고 작다. 필자의 생각으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양개문혁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사회의 모순과 충돌이 갈수록 격렬해지면서, 필자는 "양개문혁설"이 문화혁명의 조반파에 관한 이론, 사상관점과 정서가 3,4십년동안 잠복했다가 현재 중국의 이런 사회에서 이런 사회모순이 급격하게 발효하는 상황하에서, 필자의 관점은 점전 천후이에 가깝게 접근해갔다. 필자의 생각으로 통계적인 의미애서 수량이 너무 적다. 그것은 첫번째 문혁과 나란히 언급할 수준이 못된다. 다만 그것의 의미는 현재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 필자의 관점은 약간 "양개문학설"에 가까워져 있다. 다만 필자는 기본적으로는 "일개문혁설"에 동의한다.

이 방면의 견해는 여러가지이다. 예를 들어, 충칭에 허슈(何蜀)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충칭당사잡지의 주편(主編)이다. 그의 관점은 대체로 나와 일치한다. 조반파는 속았다는 것이고, 그는 심지어 조반파는 문화대혁명기간중 그거 깨고 부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고 본다.

필자는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본다. 모두 이 점에 흥미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중국사회의 모순이 날로 첨예해지면서, 모택동의 문화혁명이론은 현재, 당대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지고 있다. 모택동은 인민군중, 혁명군중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얘기하고, "타도주자파"를 내걸었으며, 대민주를 해야한다는 이론을 내걸었다. 당초 내걸때는 중국혁명은 좌경화되어 무슨 '자본주의의 길을 간다'는 것도 없었고, '시장경제는 그림자도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견강부회이다. 나중에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고, 무슨 부정부패가 나타나고, 지금 '주자파'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래도 갈수록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 심지어 모택동이 당시 문화혁명을 선전할 때보다는 더 이치에 맞는다. 모택동은 당시에 말했다. "사회주의혁명을 하는데 자산계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바로 공산당내에 있다." 이것은 황당무계한 말이다. 자산계급이 어찌 무산계급의 선봉대 안에 있단 말인가? 모두 이것은 황당하다고 여겼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이 모택동의 영명과 식견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현재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집권파는 바로 특권계층이다. 부정부패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 현재 하는 것은 시장경제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상황은 이렇다. 80년대에 모택동의 이 이론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진운과 등소평이 문혁을 부정한 것이 깊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았다. 나중에 특권계층이 갈수록 심해지고, 특수이익집단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특히 시장경제를 하고난 후, '주자파'라는 이 개념은 합리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것같다. 황당함이 점점 약화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이론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자신의 연구에 따르면, 조사를 해보고 알아냈다. 구정때, 허난성의 일부 군중, 해고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그들이 내건 기치는 바로 모주석의 기치였다. 가지고 나온 화상은 모주석의 화상이고, 그들의 구호는 당초 문화혁명때의 그 "특권계층타도"와 같은 구호였다. 이점은 주목할 만하다. 필자는 최근에 충칭의 사건을 주목하고 있다. 충칭의 조반파의 모든 우두머리들은 미친듯이 보시라이를 옹호하고 있다. 이들 조반파는 원래 등소평과 진운의 숙청을 당했고, 원래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당초 그들이 모택동에 충성하는 것이 공산당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결국 모조리 두드려맞고, 청산을 당해버렸다. 지금 보니, 모택동이 말한 것이 갈수록 들어맞는다. 너희는 바로 주자파의 복벽이다. 중국을 자본주의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이다.

양판은 이렇게 물었다: 충칭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는가 가짜라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가짜이다. 충칭에서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가장 미친듯이 충칭을 열렬히 옹호하고, 심지어 충칭을 위하여 도산검림도 오르겠다고 하고 그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문화혁명의 그 조반파들이다. 특히 그 조반파의 우두머리들이다. 양파는 당초에 심하게 싸웠었다. 현재는 공동으로 일치하여 충칭을 열렬히 옹호한다. 이것이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또 하나의 사고방식이 있다. 모두 잘 알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문화혁명에 열렬히 참여했던 본인같은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청산을 당했으므로, 그들은 반성을 했다. 본인은 문화혁명에 대하여 철저히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서방에도 1968년에 대응하는 조반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문화혁명중에 파리학생, 미국학생, 스탠포드의 학생, 하버드대학의 학생, 일본의, 독일의 학생들이 일으킨 조반이다. 서방학생의 1968년 조반파는 중국의 조반파의 최후와 같지 않았다. 우리는 청산을 당하여 매우 비참하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사회였고, 아무도 그들을 청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중에 학자들중의 엘리트가 되고, 현재 그들은 서방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의 일부는 대학에서 학과장이나 원장급이 되었다. 그들은 문혁의 관점을 견지한다. 중국이 "사인방"을 체포한 후 그들은 아주 분노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뼈가 마르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런 일을 중국우파의 반혁명정변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런 견해를 계속하여 유지한다.

아주 불행하게도, 중국인들이 해외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 특히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 지금도 엘리트이다. 그들은 그곳에 간 후에 그들의 지도교수가 서방의 좌파이므로, 문화혁명에 대한 견해를 그들에게 주입시켰다. 여기에 저명한 인물 가장 전형적인 인물은 바로 추이즈웬(崔之元)이다. 추이즈웬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의 지도교수는 미국이 좌파학자이다. 그들에게 문혁을 찬미하는 내용을 가르친다. 그래서 추이즈웬이 나중에 발표한 견해는 "모주석이 우리를 가르쳤고, 문화대혁명은 7,8년내에 다시 한번 오며, 이것은 중국미래이 정치건설에서 하나의 원칙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같이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들에 있어서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7,8년내에 다시 한번 문화대혁명이 오고, 우귀사신이 뛰어나오며, 우리는 무산계급의 쇠빗자루로 모조리 그들을 쓸어낼 것이다"라는 것은 아주 공포스럽고 아주 두려운 일이다. 다만 이 귀여운 추이즈웬같은 신좌파는 서방의 지도교수로부터 그것을 배운 후에 주장한 것이다. 그의 민주모델은 "모주석이 가르친 문혁이 7,8년내에 다시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혁명에서 조반파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공정을 추구한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현재의 사회는 불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문혁이론은 시장을 가지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현재 유명대학(추이즈웬은 미국에서 돌아와 칭화대학에 갔다)에는 일부 서방의 좌파스승에게 문혁이론을 배운 교수가 있다. 그들은 현재 중국의 대학생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이론을 주입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나는 아주 두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개문혁록"이 그들에게 유력한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문화혁명이라는 대동란과 대투쟁의 사정이 또 발생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만일 국면이 안정적이면 문화대혁명에 투신하였던 이세대는 철저히 무대에서 퇴출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일찌감치 은퇴하면 문화대혁명을 겪은 가장 젊은 사람은 57,8세가 될 것이다. 그들도 몇년이 지나면 은퇴한다. 이 세대는 없어지는 것이다. 문혁과 유사한 현상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중국사회가 통제불능이 되면, 다시 문화혁명과 같은 것이 나타날 것이다. 누군가 '주자파타도'와 같은 당당한 구호를 내걸고 관료특권계층을 공격할 것이며, 대동란이 나타날 것이다. 이럴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때, 사회에 통제불능상황이 발생한다면 문혁이라는 괴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혁에 대한 연구를 중시해야 한다.

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과 역사적 지위(첸리췬)

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과 역사적 지위(첸리췬) view 발행 | 번역


이 글은 [中國現代文學三十年](上海文藝出版社,1987.3,上海)의 제 1장 緖論 : 中國現代文學的基本特質和歷史位置(1-17쪽)를 완역한 것이다. [中國現代文學三十年]은 錢理群. 吳福輝. 溫儒敏. 王超氷이 나누어 집필하고 錢理群이 최종적으로 수정하였다. 이 부분은 錢理群이 집필하였다. 이하 역주의 경우 각주 번호 뒤에 *표를 붙임.
錢理群

<개 요>

‘20세기 중국 문학’이라는 틀 속에서 그 본격적 전개의 상편(上篇)에 해당하는 현대 문학(1917~1949)의 기본 성질을 ‘국민 영혼 개조’로, 이념형을 ‘반제 반봉건 민족 문학’으로, 기본 모순을 ‘세계성과 민족성’, ‘통속화와 현대화’의 대립 통일로 파악.


<목 차>(괄호 부분은 옮긴이가 요약하여 부친 것이다.)

1.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
(1) (제재와 주제)
(2) (창작 방법---리얼리즘, 모더니즘, 로맨티시즘)
(3) (내용과 형식---통속화와 현대화)
(4) (작품의 사상성---인식 가치와 심미 가치의 불균등)
2. 중국 현대 문학과 전통 문학․세계 문학의 종적․횡적 연계---(민족성과 세계성)



‘중국 현대 문학 30년(1917~1949)’은 20세기 중국 문학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상황과 짜임새를 살펴보면 20세기 중국 문학은 다음과 같이 잠정적으로 획분할 수 있다. 무술변법(戊戌變法) 전후부터 ‘5․4’ 신문화 운동까지의 20년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중국 신문학의 온양․준비 시기이고, 이 책에서 연구하려는 ‘5․4’ 신문화 운동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의 30년간의 문학의 발전은 20세기 중국 현대 문학의 ‘상편’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의 문학은 그 ‘하편’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중국 문학 전체는 중국 사회의 대변동의 산물이자 중국 민족이 크게 각성하고 분발한 산물인 동시에 동서양 문화의 상호 충돌과 영향의 산물이기 때문에 정체성(整體性)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사회 변동의 성질, 민족 각성과 분발의 내용이 달랐고 동서양 문화의 충돌과 영향의 특징이 달랐기 때문에 각 시기마다 특색이 있는 발전 단계를 형성하였다.


1.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


20세기 중국은 오래된 봉건 왕국에서 현대화된 사회주의 국가로의 역사적 전변을 거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사회적 대격동과 대진통을 겪으면서 전체 민족이 전변되고 분발하였으며 현대 중국 민족의 새로운 경제․정치․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 현대 문학은 바로 사회의 대격동과 민족의 대분발이라는 사회 역사적 배경 아래 탄생․발전하였고 아울러 현대 민족 문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었다.
20세기 중국 사회의 대격동의 첫단계는 폐쇄된 봉건적 종법 사회에서 반봉건 반식민 사회로의 고통스러운 전환이었다. 이 역사 과정은 비록 1840년 아편전쟁(鴉片戰爭)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 사회의 급격한 반식민지화는 1894년 갑오전쟁(甲午戰爭) 패배 이후 광분한 제국주의의 중국 분할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20세기 전체를 관통하고 현대 중국의 민족 심리와 민족 문화에 거대한 영향을 준 민족적 위기감은 바로 이 시기에 크게 강화되었다. 엥겔스에 의해 “결정적 의의를 가진” “삼대 발견”의 하나로 평가된 서양의 근대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인 다윈의 진화론 또한 이 시기에 중국에 전입되어 현대 문학의 일세대 작가인 루쉰(魯迅) 등을 포함한 중국 현대 지식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시를 풍미했던, 옌푸(嚴復)가 번역한 「천연론(天演論)」은 사람들이 현실 생활에서 느낀 민족적 위기감을 과학 이론적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중국 민족의 운명에 대한 지식인의 사고가 이때부터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전 인류와 전세계의 역사 발전으로부터 오래된 중화 민족의 도태 위험을 보았고 그로부터 변혁이라는 역사적 요구가 형성되었다. ‘중국 중심론’이라는 미신의 타파는 사상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왔다. 무술변법은 비록 철저하지 않았지만 현대 중국의 변혁이라는 역사적 요구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것이었고, 운동 과정에서 ‘서학’에 대한 초보적 개방은 무술정변에 현대적 사상 계몽이라는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최초의 변혁과 각성의 사상 계몽 과정에서 문학 변혁에 대한 주장이 나타나고 현대 문학의 기본 관념이 형성되었다. 무술변법의 주요 추동자인 부르주아 개량주의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캉여우웨이(康有爲), 황준셴(黃遵憲), 탄쓰통(譚嗣同) 등은 무술변법 전후에 ‘시계 혁명’, ‘소설계 혁명’, ‘백화문 운동’ 등의 문학 개량 운동을 추동하였다.
량치차오는 1901년 「신민설」에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내놓았다. “오늘날 열강의 민족적 제국주의에 대항함으로써 큰 재난을 극복하고 생령을 구하고자 하는 데에는 우리의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계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중국에서 실행하는 데에는 신민(新民)에게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로부터 1년 후 량치차오는 「소설과 뭇다스림의 관계」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발전시켰다.

한 나라의 백성을 새롭게 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소설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도덕을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고, 종교를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며, 정치를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고, 풍속을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며, 학예를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인심을 새롭게 하고 인격을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한다.”

량치차오 식의 과장된 언사의 밑에는 다음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기본 사상이 깔려 있다. 즉, 문학을 민족의 도덕, 풍속, 인심, 인격의 개조 및 갱신과 연계시켜 문학의 사상 계몽적 기능을 고도로 중시하고 강조했으며 문학을 “백성을 새롭게 하는”, 다시 말해 민족 정신을 분발시키고 민족의 새로운 성격을 창조하는 강력한 무기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 구국’의 색채를 짙게 지닌 량치차오의 민족 공리주의적 문학관은 현대 문학 문학관(념)의 한 기초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량치차오가 문학과 부르주아 개량주의 정치 운동의 직접적 연계와 문학의 사상 계몽에 대한 의의를 강조하고 문학의 기능을 과장(그 본질은 부패한 봉건 제도의 수호였지만)한 것은 이후 현대 문학 사상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량치차오 이후 왕궈웨이(王國維)는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철학 사상과 미학관을 끌어들여 “이해를 초월한”“문학 자신의 가치”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진정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문학에 대한 자각적 의식이었다. 그는 창끝을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봉건적 전통 문학관(념)을 겨누면서 문학이 봉건적 윤리 도덕에 종속된 시녀의 지위에서 해방되어 독립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사상은 대단히 중대한 의의를 가졌다. 량치차오와 왕궈웨이의 문학관이 절대적으로 대립되어 양극단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대 정신의 두 측면 즉, 제국주의 열강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봉건 전제의 사상 통치를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금세기 초의 민족적 각성과 문학적 각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다. 왕궈웨이가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량치차오가 “문학을 정치와 교육의 수단으로 간주”한 점이었다. 그는 “철학가이면서 정치 및 사회의 흥미를 흥미로 삼고 진리 여부는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 또한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뭇신을 섬기는 문학은 결코 진정한 문학이 아니다”라고 인식하였다. 그가 강조한 ‘초공리’는 절대적으로 공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협애한 ‘조급한 공리’를 반대하는 것으로, “천하 만세의 공적을 구하지 일시의 공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사실상 왕궈웨이 자신은 중국 현대의 지식인이면서도 중국 문인의 울분을 토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전통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시경󰡕 「절남산(節南山)」과 타오위엔밍(陶淵明)의 「음주(飮酒)」에서 시인이 ‘생활을 걱정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경향을 긍정하였고, 심지어 “시가 법도로 삼을 것은 인생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고립된 생활이 아니라 가족과 국가 및 사회 속에서의 생활이다”라고 하면서 인생과 국가 및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량치차오와 왕궈웨이의 문학관을 지양․종합하여 보다 완정한 현대적 문학관을 세운 사람은 이후 ‘현대 문학의 조류를 지도’한 루쉰과 저우쭤런(周作人)이었다. 그들은 1908년에 발표한 「악마파 시의 힘에 대해(摩羅詩力說)」와 「문학의 의의와 사명 그리고 중국 최근 문론의 실책을 논함(論文章之意義及其使命因及中國近時論文之失)」에서 문학 예술과 민족의 흥망 성쇠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그들은 “문학은 그것에 국민 정신이 기탁하는 것이고”, “문학이 혁신되면 사상은 편안해지고 국민 정신은 아름답고 위대한 데로 나아갈 것이니, 이는 미래의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저작의 극치는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데 있으니 흥취를 느끼게 하고 미감이 있어야 한다”라는 ‘순수예술파’와 “문장의 절묘함은 자기 고백에 있고” “그것을 빌어 작가의 심리 상태를 볼 수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자아 표현파’의 문예관을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문장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상이 담겨 있고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미적 정취가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고, 문학의 기능은 “인간의 이상을 함양”시키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중간 자취”로서의 “이미지, 감정, 멋의 세 가지”를 “매개로 삼아”야만 비로소 “오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문학에는 단지 ‘간접적 기능’만 있을 뿐 ‘비실용적’이므로, 민족 정신과 국민 영혼에 대해서도 점차적인 훈도와 영향을 통해서만 민족을 진작시키는 공리적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다. 만약 “권선징악을 기준으로 세워” 분명한 실용적 효과를 추구한다면 문학은 ‘가장 협애한 지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루쉰과 저우쭤런은 여기에서 시대와 민족의 역사적 발전이 문학에 제출한 객관적 요구를 문학 자체의 법칙과 유기적으로 통일시켜 ‘민족 영혼 개조’를 중심으로 삼아 시대적 특색과 민족적 특색을 갖춘 완정한 문학관을 형성하였다.
저우씨 형제가 금세기 초에 제출한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관(강조-원문)은 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적인 문학관을 개괄하고 있다. 역사와 문학의 각 발전 단계에서 끊임없이 발전하였고 각종 변형태가 출몰하였으며 계급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작가 사이에 여러 가지 고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정신은 금세기 중국 현대 문학의 총체적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지배하였다. 현대 문학의 위대한 개막으로서의 ‘5․4’ 문학 혁명에서 우선적으로 강조된 것은 문학 혁명과 사상 혁명의 밀접한 관계 및 문학의 사상 계몽적 기능이었다. 루쉰은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말했다.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10여년 전의 ‘계몽주의’ 사상을 품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것은 ‘인생을 위하고’ 이 인생을 개량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의 소설을 ‘소일로 읽는 책’이라 하는 것을 깊이 증오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소일거리’의 신식 별칭에 불과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병태적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 속에서 제재를 많이 취했는데 그 의도는 병고를 들춰내어 치료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있었다.

루쉰을 대표로 하는 5․4 작가들은 문학의 계몽 대상을 하층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민족의 기초를 이루는 대다수를 환기시키는 것, 다시 말해 하층 인민의 각성을 문학의 기본적 임무로 삼음으로써 ‘민족 영혼 개조’ 문학관의 틈실한 사회적 기초를 획득하였다.
5․4 시기 창조사(創造社) 작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소리 높여 외쳤는데, 사실 그 또한 ‘문학의 자각’을 표현하였고 동시에 문학의 ‘사회적 영향’을 중시하였다. 그들의 이상은 “구국 구민”의 “자각 속에서 생성되는 예술은 그 자체로 자신의 독립적인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중국의 전도에 대한 그 기능은 무한하다”는 것이었다. 5․4 이후 대혁명이 실패하기 전후에 루쉰을 대표로 하는 현대 문학 일세대 작가들은 문학의 사상 계몽 작용에 대한 과대한 환상이 엄혹한 계급 투쟁의 현실 속에서 파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문학에 위기가 발생하였다. 루쉰 및 일단의 작가들은 이로부터 맑스주의자 또는 맑스주의 동반자의 길로 나아갔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도하는 인민 대중의 정치 혁명에서 민족을 분발시키는 현실적 물질 역량을 발견하였다. 문학관에서는 “문학으로 건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는” 관념론적 이론틀을 지양하면서도 ‘민족 영혼 개조’의 합리적 핵심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노농 대중을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계급 공리주의적 요구와 결합하여 현대적 문학관의 주류가 되었다. 그후 마오저뚱은 「옌안 문예 좌담회에서의 연설」에서 맑스주의 문예 사상을 중국 문예 운동의 실제와 결합시켜 ‘문예는 노농병을 위하는’ 방향을 제기함으로써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저우쭤런을 대표로 하는 소수 작가는 ‘문학 무용’의 허무주의로 나아가 이른바 ‘순수 자아 표현’의 문학관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문학은 결국 민족 영혼의 마취제로 타락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매국노 문학이 되었고 그로 인해 강렬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진 중국 독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1930년대의 일부 자유주의 작가들은 정치와 거리를 유지하자는 문학 주장을 제출하였다. 이 점에 있어 그들은 금세기 초의 왕궈웨이의 문학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가 이처럼 혼란스러워진 것은 순전히 제도 문제가 아니라 인심이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기본 신념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성정을 도야”하고 “인심을 정화”하는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문학의 기능을 과장함으로써 현존 제도를 수호한 점에서 그들은 금세기 초의 량치차오와 놀랄 만한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민족 영혼을 ‘재창조’하는 문학의 기능을 중시한 것은 현대 문학의 기본적 문학관과 일치하고 있다. 과거에 우리는 자유주의 작가와 좌익 작가 사이에 문학과 정치의 관계 등의 문제에서 야기되었던 분기를 비교적 중시하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문학 사상의 계몽적 기능을 중시하는 등의 측면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소홀하게 취급된 것은 편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20세기 중국 문학, 특히 우리가 연구하려는 30년간의 현대 문학은 주요하게는 현대 중국의 반제 반봉건 민족 문학(강조-원문)이기 때문에 인민 내부의 각 계급 문학의 범주는 중요하고(특정한 역사 단계, 예를 들어 현대 문학의 둘째 10년도 매우 두드러진 지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종속적인 지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부르주아 문학의 모순과 투쟁을 현대 문학 발전의 주선으로 삼는 것은 분명 타당하지 않다. 현대 문학의 문학관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이라는 주도적이고 총체적인 문학관을 부각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 그 역사적 장점 및 불가피했던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민족 영혼을 개조’하는 문학으로서의 특유의 사상 계몽 성격은 현대 문학의 근본 특징이다. 그것은 현대 문학의 기본적 면모를 결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 문학의 기본 모순을 끌어내고 현대 문학의 발전을 추동하였으며, 아울러 이로부터 문학 제재․주제․창작 방법․문학 형식․문학 풍격 등에서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을 형성하였다.

(1) (제재와 주제)

민족 영혼을 개조하는 계몽 문학으로서 문학의 표현 대상은 반드시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인생이다. 금세기 초에 린수(林紓)는 서양 문학을 소개하면서 잉글랜드 작가 디킨즈가 “유명한 인사와 미인의 틀을 깨고 나와 하등 사회만을 전적으로 그렸다”고 극구 찬양하였고 디킨즈 작품의 가장 귀중한 점은 “기이하지 않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서술한 점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5․4시기에 저우쭤런은 커다란 영향을 미친 「평민 문학」에서 “우리는 영웅 호걸의 일과 재자 가인의 행복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 세간의 평범한 남녀의 슬픔과 기쁨, 성공과 패배를 기록하면 된다. 영웅 호걸과 재자 가인은 세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대부분이 평범한 남녀이고 우리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그리는 것이 보다 보편적이고 자신에게도 보다 절실하다”라고 하였다. 류반농(劉半農)은 「중국의 하등 소설」이라는 강연에서 세계 발전의 역사 조류에 유의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후의 세계는 협의의 귀족이든 광의의 귀족이든 모두 소멸할 수밖에 없는 추세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학에 대한 안목도 紳士派의 문학관에서 平民派의 문학관으로 전화해야 합니다. … 우리는 소설에 공력을 들일 때 하등 사회의 실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로부터 문학의 제재와 ‘주인공’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루쉰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소설의 주인공은 용감한 장군과 책사, 의적과 부패한 관리, 요괴와 신선, 가인과 재자였는데 후에는 기녀와 오입쟁이, 무뢰배와 노복의 무리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5․4 이후, 새로운 지식인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유럽․어메리카의 비바람 속에서 흔들림을 느꼈기 때문에 대부분의 단편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옛날의 영웅과 재자의 티를 벗지 못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문학은 “분명하게 탈바꿈”하여 “결코 영웅이 아닌” 보통의 노동자, 농민과 병사가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루쉰은 인식하였다. 현대 문학의 제재 범위는 매우 광범하다 할 수 있다. 현대 중국 사회의 반식민지화 과정에서 거의 모든 계층이 겪었던 운명과 사상, 감정과 심리의 변화가 모두 현대 작가의 예술 표현의 영역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중국 민족의 각성 과정에서 차지하는 지식인의 위상 및 농민의 각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성격과 그 과정의 지난함으로 인해 작가는 지식인과 농민의 운명 및 그들의 상호 계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농촌 제재와 지식인 제재는 중국 현대 문학의 두 가지 기본 제재가 되었다.
루쉰은 금세기 초 문예 운동에 종사하면서부터 상호 관련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첫째, 가장 이상적 인성은 어떠한 것인가? 둘째, 중국의 국민성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 셋째, 그 병근은 어디에 있는가? 루쉰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사고와 탐색은 금세기를 관통하고 있고 이로부터 중국 현대 문학의 두 가지 기본 주제---‘이상적 인성’의 표현과 국민성의 약점 및 병근의 게시 및 비판---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기본 주제는 시기와 작가에 따라 상이한 중점과 변주를 형성하였다. 대체적으로 보아 5․4 시기의 문학은 보다 강렬한 비판성을 가지고 국민적 약점을 드러내는 주제가 두드러지게 전면에 부각되었고 작가는 대개 부정과 비판의 형식으로 자신의 이상을 정면으로 표현하였다. 작가가 긍정한 이상적 인물과 개성은 대부분 서양적 개성 해방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1930년대의 문학 주제는 표현의 다양화라는 발전적 추세가 출현하여 보다 복잡하고 풍부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작가는 각자의 정치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상적 인성’을 주조하였다. 맑스주의를 지도 사상으로 삼은 프롤레타리아 작가는 노농 대중의 현실 투쟁으로 들어가 ‘프롤레타리아 신인’을 찾은 반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작가 중 어떤 사람은 원시적인 문화의 전통이 비교적 많이 보존되고 신사조의 충격을 받지 않은 질박하고 예스러운 농촌 사회에서 ‘이상적 인성’을 발굴하였으며(선총원), 어떤 사람은 시민적 문화 전통에서 ‘이상적 인물’을 발견했고(라오서), 어떤 사람은 상승 시기의 서양 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규범에 맞추어 스스로의 이상 속의 ‘영웅’을 창조하였다(바진). 한편 비판적 주제는 프롤레타리아 작가 및 일부 민주주의 작가에게서 민족 성격의 병태를 조성하게 만드는 병태적 사회 및 병태적 전통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점차 전향되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첨예한 정치 비판적 색채를 띠었다. 일부 민주주의. 자유주의 작가는 5․4 시기의 ‘국민성 개조’의 주제를 계속 견지하여 심화시켰다. 항일민족해방전쟁 초기에 ‘민족 신인’의 전형을 창조하는 것은 정치 경향과 문화 배경이 다른 작가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항전 중. 후기에 국통구 및 일본군 점령구의 문학에는 비판과 폭로의 주제가 두드러졌다. 민족의 진보를 저해하는 민족의 고질에 대한 비판이건 사회 암흑의 폭로이건 모두 새로운 깊이에 도달하였다. 공통구의 문학도 사회 해방과 민족 해방이라는 현실 투쟁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신인’에 대한 예술적 전유와 표현이 보다 성숙해졌고 ‘농민 개조’의 주제도 심화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만한 것은 항일민족해방전쟁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고양되는 가운데 작가들이 그려낸 ‘이상적 인성’은 대개 중국의 전통적 도덕성이 매우 짙은 풍격과 모범을 갖추었으며 강렬한 서양적 개성 해방의 색채를 가진 인물이 오히려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어 더이상 ‘신인’의 지위와 특징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5․4에서 항전 시기까지 ‘이상적 인성’의 내용이 보여주는 전이 과정 및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나타난 도덕 관념, 가치 관념, 심미 관념의 변화는 깊이 있게 고찰해 볼 점이다. 그러나 현대 문학의 제재와 주제의 전체 역사의 발전은 현대 문학과 진보적 사회 사조 및 민족 해방 운동, 인민 혁명 운동의 긴밀하고 자각적인 광범한 연계를 충분히 표현하였다. 이것은 현대 문학의 중요한 문학 전통을 이루었다.

(2) (창작 방법---리얼리즘, 모더니즘, 로맨티시즘)

현대 문학의 ‘민족 영혼 개조’라는 계몽적 성격은 또한 문학 창작 방법의 선택을 결정하였다. 현대 문학은 자신의 역사 개막 시기에 서양의 각종 문예 사조, 창작 방법, 예술 유파를 광범하게 수입하였고 여러 가지 창작 방법을 시험하였다. 그런데 역사적 선택의 결과 서양의 현대 문학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던 모더니즘 문학이 중국에서는 주도적인 문학 조류가 되지 못하였다. 중국 현대 문학에서 리얼리즘 문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중국의 사회 역사적 상황과 문학의 계몽적 성격이었다. 사회의 대격동 과정에서 사회 모순이 유례없이 격화되었고 깊이 있게 현시 되었으며 이는 리얼리즘 문학에 풍부한 창작 소재를 제공하였다. 문학의 계몽적 성격은 문학의 기본 임무를, 인간을 기만하고 속이는 정신적 미몽을 타파하고 생활 본래의 생생한 면목에 따라 현실 생활을 반영하며 현대 중국 사회의 진실한 모순 운동을 드러냄으로써 현실 변혁의 열정을 격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과감하게 현실의 암흑(사회의 암흑과 인심의 암흑)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사실대로 묘사하되 결코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각성한 리얼리즘이 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으며 강고한 문학 전통을 형성하였다. 동시에 문학의 ‘민족 영혼 개조’적 성격은 또한 현대 문학의 리얼리즘이 필연적으로 루쉰이 십분 긍정했던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사람에게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는” “높은 의미에서의 사실주의”임을 결정하였다. 이는 “영혼의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 정신적 고통을 받게 한다”는 점에서 서양 모더니즘과 내재적인 공통점을 가지게 하였고 이로 인해 모더니즘의 창작 기법이 중국 현대의 리얼리즘 문학에 흡수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앞에서 서술한 ‘이상적 인성’의 추구는 중국 현대 문학이 동시에 이상주의적 색채를 띠게 하였고 따라서 로맨티시즘이 현대 문학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 현대 문학에서 주조를 이룬 리얼리즘 문학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창작 기법을 포용할 수 있는 개방적 형태를 취하였다.

(3) (내용과 형식---통속화와 현대화)

현대 문학의 ‘민족 영혼을 개조’하는 계몽적 성격은 문학의 내용과 형식에 두 가지 측면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하나는 문학의 통속성, 즉 문화 정도가 낮은 보통 민중이라는 계몽 대상에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을 요구하였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현대성, 즉 현대적 의식. 현대적 사유 방식․정감 방식을 표현하고 그것에 부응하는 현대적 예술 형식을 채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 의식․사유 방식․예술 감상 능력이 모두 몽매한 상태에 놓여 있고 저급한 단계에 처해 있는 독자를 현대화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현대 문학 발전 과정에서의 기본 모순이다. 이 모순은 문학 형식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언어 문자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만청 백화문 운동은 언어의 통속성을 강조하고 언문 합일을 추동하여 계몽의 책임을 다했지만, 새로운 사물과 개념을 나타내는 새로운 술어를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현대 의식과 현대적 사유 방식을 표현하는 데 커다란 제약을 받았다. 이에 대해 량치차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순수한 백화체로 논리적인 글을 짓는다면 가장 힘든 일은 술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만약 일일이 통속성을 구하다가는 의미가 천박해질 뿐만 아니라 부정확해진다.” 그러므로 량치차오는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였다. 한편으로는 외래어 및 외국 언어(특히 일본어)를 흡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문언(특히 추상명사)을 백화화시킴으로써 외래 사상이 중국의 원래 언어와 조화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였다. 5․4 시기 푸쓰녠(傅斯年)은 “유럽화된 백화문”을 “이상적인 백화문”으로 삼았고, 저우씨형제는 “딱딱한 번역(硬譯)”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방안은 통속성과 현대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해의 가능성’에 대해 장기간 논쟁되었다. 시가 형식 문제에 대한 쟁론과 탐색 또한 현대 백화문을 어떻게 운용하여 현대 중국인의 현대적인 시적 예술 사유 방식을 표현할 것인가 라는 지난한 예술적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후스(胡適)는 초기 백화시 이론에서 ‘통속화’ 문제를 우선적 위치에 놓고 “말하는 대로 쓸 것”을 강조하였고 글을 짓듯이 시를 씀에 외적으로는 언어 형식을 산문화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시의 예술 사유 방식도 산문식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해하기에는 쉽지만 시맛이 떨어지는 ‘후스체’라는 백화시를 만들어 냈다. 이후 상징파 시인들은 ‘순수’한 현대시를 창조하기 위해 “시적 사유 기술”과 “시의 논리학”을 발견하여 “시적 사유 방법으로 직접 사유하고 시적 선율을 가진 문자로 직접 묘사할 것”을 명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의 “현대화”를 강조한 점에서 “통속적이지 않다”라든가 “어려워 이해할 수 없다”라는 등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바로 문학의 통속화(및 그것과 상호 연계되면서도 일정한 차별점이 있는 대중화와 민족화)에 대한 요구와 문학의 현대화에 대한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의 대립 통일이 작가들의 장기간에 걸친 지난한 예술 탐색을 추동하였고 현대 문학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4) (작품의 사상성---인식 가치와 심미 가치의 불균등)

현대 문학의 ‘민족 영혼을 개조’라는 계몽적 성격은 현대 문학의 작품의 사상성(사상의 깊이와 넓이), 문학의 인식 가치․교화 작용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금세기 초에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관이 형성되면서부터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개진되었다. “문학이라는 것은 인생과 사상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상성의 추구를 방기하면 “형식만 두드러지고 내용적 의미는 없어진다.” 즉 문학이 쇠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가는 “반드시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중국 대부분의 현대 작가(혁명 작가에 국한되지 않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문학가들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혁명가․사상가․작가 또는 학자와 작가, 혁명가․학자․작가의 삼자가 합일된 품격을 동시에 겸유하였고, 그들의 정치 활동․학술 활동․문학 활동은 대개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철학․정치학․윤리학․역사학 … 등이 그들의 문학에 스며든 것은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문학 전반에 걸쳐 이성적 비판 정신과 탐색 정신이 충만하였다. 특히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흥기한 이후, 혁명 이론의 창작에 대한 지도 작용이 강조되었고 선명한 사상적 경향성이 요구되면서, 명확한 목적성을 가진 자각적인 창작이 현대 문학 창작의 주도적인 경향이 되었다. 현대 문학의 이와 같은 역사적 특징은 그것이 담당했던 사상 계몽의 역사적 사명과 통일되고 일치된 것으로서, 역사적 필요성과 합리성, 그리고 적극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비예술’적인 것이 예술의 영역으로 쉽게 비집고 들어와 예술 역량에 직접적으로 해를 끼쳤으며 문학의 심미 가치를 저하시켰다. 현대 문학사에서 예술 자체의 추구를 스스로 방기하여 문학 예술을 일반 정치 선전물과 동일시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현대 문학 창작에서 작품의 인식 가치와 심미 가치의 불균등은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우리에게 사상과 예술이 완미하게 결합된 예술 진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총체적으로 보면 현대 문학의 인식 가치가 심미 가치보다 높다는 것은 은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현대 문학의 특유한 역사 과도기적 성질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중국의 수천 년의 역사가 창조한 고전 문학으로부터 세계의 선진 대열에 위치한 현대화한 중국이 창조할 미래의 신세기 문학으로 통하는 교량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2. 중국 현대 문학과 전통 문학․세계 문학의 종적․횡적 연계(민족성과 세계성)


이상으로 우리는 중국 일국의 각도에서 현대 문학이 생성된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 및 이로 인해 결정된 현대 문학의 기본적 성격과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20세기 세계(세계 문학을 포함하여)는 하나의 통일체가 되었고 어떤 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은 그 국제 환경과 뗄 수 없으며 세계적 범위에서의 상호 영향과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금세기 초에 “오랜 세월 완전히 정체되었던 국가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지던” 중국의 각성과 아시아의 각성은 “20세기초에 열려진 전세계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표지한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의 각성의 산물로서의 현대 문학 역시 그 의의는 중국 일국의 범위를 초월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 각도에서 중국 현대 문학 생성의 문화적 배경을 고찰해 보면 현대 문학은 바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교차점에서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국 문학은 장기간의 발전 과정에서 민족 특유의 미학 원칙과 문학 전통을 형성하였으며, 서양 문학의 각종 장르, 예술 형식, 표현 기법, 창작 방법도 비교적 충분하고 성숙하게 발전하였다. 동시에 중국 문학과 서양 문학은 모두 문학 발전의 고조기가 이미 지나가고 새로운 돌파와 변혁을 준비하는 단계에 처해 있었다. 역사의 전변 시기에 ‘중국 중심론’과 ‘서양 중심론’이라는 자아 집착의 타파는 상호 교류를 통해 상대방에게서 문학 발전의 새로운 동력을 흡수하려는 역사적 요구를 형성하였고 아울러 이러한 교류와 충돌 과정에서 통일적인 세계 문학을 형성하였다.
굳게 닫혔던 중국의 대문이 1840년 서양의 군함과 대포에 의해 열렸지만 서양 문학이 진정으로 대량 유입되고 중국 전통 문학에 충격을 준 것은 1898년 무술변법 전후였다. 특히 1897년부터 린수가 서양의 문학 명작을 대량으로 번역 소개한 것은 중국 사상계와 문단을 진동시켰고 중국 현대 문학의 일세대 작가를 직접적으로 배양하였다. 서양의 문학 작품은 중국의 전통적 봉건 문학과는 이질적인 완전히 새로운 문학으로, 그것들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이미 성숙해진 중국의 문학 변혁의 요구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였고, 아울러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서양 문학의 모범을 제공함으로써 전통 문학을 혁신할 수 있는 전면적이고 새로운 역사의 길을 닦았다. 량치차오를 대표로 하는 부르주아 개량파의 사상가들은 서양 문학의 중국 전통 문학에 대한 충격력을 이용하여 문학 개량 운동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채용한 노선은 여전히 ‘중학위체, 서학위용’의 노선, 즉 중국 봉건주의 구문학의 기본틀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키지 않는 전제 아래 일부 서양 문학의 새로운 술어, 개념, 기법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린수는 서양 소설이 “모두 (중국-옮긴이) 고문의 의법(義法)을 체득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중국 전통 문학으로 서양 문학을 개조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개량주의 노선 아래 량치차오 등이 발동시킨 문학 개량 운동이 완전히 새로운 현대 문학을 탄생시킬 수 없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5․4 문학 혁명이 중국 현대 문학의 빛나는 기점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봉건주의 구문학을 비판하면서 조금도 모호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굳건한 태도로 서양 문학을 흡수, 차감하고 세계 문학과 긴밀한 연계를 획득한 점에 있다. 전체 5․4 문학 혁명은 먼저 문학 형식의 변혁을 돌파구를 삼은 후 다시 문학의 내용과 문학관(념)의 변혁으로 확장되었다. 문학 형식의 돌파의 관건은 소설, 시, 희극, 산문 등의 서양 문학 형식의 수입이었는데, 이는 단순한 형식의 수입에 그치지 않고 문학 형식을 외피로 하는 예술 사유 방식, 문학관(념), 식견 등을 포함하였다. 아울러 그것이 야기시킨 문학 변혁도 문학관(념)으로부터 문학의 내용과 형식 등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이었다. 서양 문학의 수입 및 세계 문학과의 폭넓은 연계는 중국 전통 문학의 변혁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였다. 다른 이질적 문학 체계와의 비교 관찰을 통해 새로운 문학관(념)에서 새로운 연구 안목을 획득하였고 현대화된 과학적 연구 방법을 흡수함으로써 사람들은 전통 문화의 유산을 새롭게 인식하였고 새롭게 발굴하였다. 5․4 시기에 루쉰과 후스가 전통 소설 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돌파는 그 좋은 예이다(그 이전에도 왕궈웨이의 중국 전통 희곡과 󰡔홍루몽󰡕 연구의 돌파가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전통 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발굴한 선구자들은 바로 봉건주의 구문화를 반대하고 외래 문화를 학습하자는 기치를 높이 든 5․4 문학 혁명의 선봉장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양 문화를 수입하고 세계 문학과 공통된 언어를 획득하는 것이 결코 민족 문학적 전통과 개성의 소멸을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민족화와 개성화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설명한다. 루쉰은 역사가 부여한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과학적으로 개괄하였다. “새로운 형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고 “내외 양면으로 세계의 시대 사조와 합류하되 중국의 민족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나아가 세계의 사업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루쉰이 지적한 것은 세계 문학의 조류, 시대의 조류, 민족적 전통, 작가의 개성의 네 가지의 결합이다. 이는 물론 대단히 높은 기준이다. 그러나 중국 현대 문학은 확실히 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시대와 개성이라는 모순 외에 문학의 세계성과 민족성의 대립 통일은 현대 문학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의 기본 모순 또는 기본적 예술 과제였다.
대체적으로 보아 5․4 시기에 중국 문학과 세계 문학이 공통 언어를 획득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구는 전명(前面)에 부각되었다. 동서양의 각종 문예 사조, 유파, 작가 작품을 폭넓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및 피압박 민족의 문학이 특히 중시되었다. 1930년대 ‘문예 대중화’ 토론의 심화에 따라 현대 문학과 민족 문학 전통의 비판적 계승의 관계, 구형식 이용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문학과의 연계가 계속 발전되면서 소비에뜨 연방의 문학과 서양 진보 문학의 영향이 나날이 증가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항일 민족 해방 전쟁시 문학의 민족 형식 문제는 작가와 이론가의 주의를 끄는 중심 문제였고, 공통구에서 현대 문학 종사자 및 신문예 종사자와 민족의 주체인 농민이 최초로 ‘대화’를 하였고 민간 문학의 가치가 새롭게 확인되고 높게 평가됨으로써 현대 문학의 민족화를 새롭게 추동하였다. 정치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의 제약 때문에 공통구 문학은 소련 문학 이외의 세계 문학과는 격절되었는데, 이는 공통구 문학 및 건국 이후의 문학에 소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국통구에서는 서양 문학과 러시아 소련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붐이 일어났다.
30년 동안의 역사 발전을 통해 중국 현대 문학은 마침내 세계 문학과의 횡적 연계 및 민족 문학 전통과의 종적 연계를 건립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문학 창조로 민족 문학 전통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세계 문학의 발전에 독특하게 공헌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적인 가치와 지위를 획득하였다. 외국 문학의 충격력의 도움을 받아 중국 민족의 전통 문학을 변혁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현대 민족 문학의 참신한 특색으로 세계 문학에서 자신의 위치를 획득하는 데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중국 현대 문학이 걸어온 길이며 30년 역사의 총결이다.

(92.4 1차 교정, 5.18 2차 교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