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과 역사적 지위(첸리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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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中國現代文學三十年](上海文藝出版社,1987.3,上海)의 제 1장 緖論 : 中國現代文學的基本特質和歷史位置(1-17쪽)를 완역한 것이다. [中國現代文學三十年]은 錢理群. 吳福輝. 溫儒敏. 王超氷이 나누어 집필하고 錢理群이 최종적으로 수정하였다. 이 부분은 錢理群이 집필하였다. 이하 역주의 경우 각주 번호 뒤에 *표를 붙임.
錢理群
<개 요>
‘20세기 중국 문학’이라는 틀 속에서 그 본격적 전개의 상편(上篇)에 해당하는 현대 문학(1917~1949)의 기본 성질을 ‘국민 영혼 개조’로, 이념형을 ‘반제 반봉건 민족 문학’으로, 기본 모순을 ‘세계성과 민족성’, ‘통속화와 현대화’의 대립 통일로 파악.
<목 차>(괄호 부분은 옮긴이가 요약하여 부친 것이다.)
1.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
(1) (제재와 주제)
(2) (창작 방법---리얼리즘, 모더니즘, 로맨티시즘)
(3) (내용과 형식---통속화와 현대화)
(4) (작품의 사상성---인식 가치와 심미 가치의 불균등)
2. 중국 현대 문학과 전통 문학․세계 문학의 종적․횡적 연계---(민족성과 세계성)
‘중국 현대 문학 30년(1917~1949)’은 20세기 중국 문학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상황과 짜임새를 살펴보면 20세기 중국 문학은 다음과 같이 잠정적으로 획분할 수 있다. 무술변법(戊戌變法) 전후부터 ‘5․4’ 신문화 운동까지의 20년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중국 신문학의 온양․준비 시기이고, 이 책에서 연구하려는 ‘5․4’ 신문화 운동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의 30년간의 문학의 발전은 20세기 중국 현대 문학의 ‘상편’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의 문학은 그 ‘하편’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중국 문학 전체는 중국 사회의 대변동의 산물이자 중국 민족이 크게 각성하고 분발한 산물인 동시에 동서양 문화의 상호 충돌과 영향의 산물이기 때문에 정체성(整體性)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사회 변동의 성질, 민족 각성과 분발의 내용이 달랐고 동서양 문화의 충돌과 영향의 특징이 달랐기 때문에 각 시기마다 특색이 있는 발전 단계를 형성하였다.
1.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
20세기 중국은 오래된 봉건 왕국에서 현대화된 사회주의 국가로의 역사적 전변을 거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사회적 대격동과 대진통을 겪으면서 전체 민족이 전변되고 분발하였으며 현대 중국 민족의 새로운 경제․정치․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 현대 문학은 바로 사회의 대격동과 민족의 대분발이라는 사회 역사적 배경 아래 탄생․발전하였고 아울러 현대 민족 문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었다.
20세기 중국 사회의 대격동의 첫단계는 폐쇄된 봉건적 종법 사회에서 반봉건 반식민 사회로의 고통스러운 전환이었다. 이 역사 과정은 비록 1840년 아편전쟁(鴉片戰爭)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 사회의 급격한 반식민지화는 1894년 갑오전쟁(甲午戰爭) 패배 이후 광분한 제국주의의 중국 분할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20세기 전체를 관통하고 현대 중국의 민족 심리와 민족 문화에 거대한 영향을 준 민족적 위기감은 바로 이 시기에 크게 강화되었다. 엥겔스에 의해 “결정적 의의를 가진” “삼대 발견”의 하나로 평가된 서양의 근대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인 다윈의 진화론 또한 이 시기에 중국에 전입되어 현대 문학의 일세대 작가인 루쉰(魯迅) 등을 포함한 중국 현대 지식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시를 풍미했던, 옌푸(嚴復)가 번역한 「천연론(天演論)」은 사람들이 현실 생활에서 느낀 민족적 위기감을 과학 이론적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중국 민족의 운명에 대한 지식인의 사고가 이때부터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전 인류와 전세계의 역사 발전으로부터 오래된 중화 민족의 도태 위험을 보았고 그로부터 변혁이라는 역사적 요구가 형성되었다. ‘중국 중심론’이라는 미신의 타파는 사상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왔다. 무술변법은 비록 철저하지 않았지만 현대 중국의 변혁이라는 역사적 요구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것이었고, 운동 과정에서 ‘서학’에 대한 초보적 개방은 무술정변에 현대적 사상 계몽이라는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최초의 변혁과 각성의 사상 계몽 과정에서 문학 변혁에 대한 주장이 나타나고 현대 문학의 기본 관념이 형성되었다. 무술변법의 주요 추동자인 부르주아 개량주의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캉여우웨이(康有爲), 황준셴(黃遵憲), 탄쓰통(譚嗣同) 등은 무술변법 전후에 ‘시계 혁명’, ‘소설계 혁명’, ‘백화문 운동’ 등의 문학 개량 운동을 추동하였다.
량치차오는 1901년 「신민설」에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내놓았다. “오늘날 열강의 민족적 제국주의에 대항함으로써 큰 재난을 극복하고 생령을 구하고자 하는 데에는 우리의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계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중국에서 실행하는 데에는 신민(新民)에게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로부터 1년 후 량치차오는 「소설과 뭇다스림의 관계」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발전시켰다.
한 나라의 백성을 새롭게 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소설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도덕을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고, 종교를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며, 정치를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고, 풍속을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하며, 학예를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인심을 새롭게 하고 인격을 새롭게 하려면 소설을 새롭게 해야 한다.”
량치차오 식의 과장된 언사의 밑에는 다음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기본 사상이 깔려 있다. 즉, 문학을 민족의 도덕, 풍속, 인심, 인격의 개조 및 갱신과 연계시켜 문학의 사상 계몽적 기능을 고도로 중시하고 강조했으며 문학을 “백성을 새롭게 하는”, 다시 말해 민족 정신을 분발시키고 민족의 새로운 성격을 창조하는 강력한 무기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 구국’의 색채를 짙게 지닌 량치차오의 민족 공리주의적 문학관은 현대 문학 문학관(념)의 한 기초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량치차오가 문학과 부르주아 개량주의 정치 운동의 직접적 연계와 문학의 사상 계몽에 대한 의의를 강조하고 문학의 기능을 과장(그 본질은 부패한 봉건 제도의 수호였지만)한 것은 이후 현대 문학 사상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량치차오 이후 왕궈웨이(王國維)는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철학 사상과 미학관을 끌어들여 “이해를 초월한”“문학 자신의 가치”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진정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문학에 대한 자각적 의식이었다. 그는 창끝을 ‘문이재도(文以載道)’의 봉건적 전통 문학관(념)을 겨누면서 문학이 봉건적 윤리 도덕에 종속된 시녀의 지위에서 해방되어 독립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사상은 대단히 중대한 의의를 가졌다. 량치차오와 왕궈웨이의 문학관이 절대적으로 대립되어 양극단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대 정신의 두 측면 즉, 제국주의 열강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봉건 전제의 사상 통치를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금세기 초의 민족적 각성과 문학적 각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다. 왕궈웨이가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량치차오가 “문학을 정치와 교육의 수단으로 간주”한 점이었다. 그는 “철학가이면서 정치 및 사회의 흥미를 흥미로 삼고 진리 여부는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 또한 진정한 철학이 아니다. …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뭇신을 섬기는 문학은 결코 진정한 문학이 아니다”라고 인식하였다. 그가 강조한 ‘초공리’는 절대적으로 공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협애한 ‘조급한 공리’를 반대하는 것으로, “천하 만세의 공적을 구하지 일시의 공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사실상 왕궈웨이 자신은 중국 현대의 지식인이면서도 중국 문인의 울분을 토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전통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 시경 「절남산(節南山)」과 타오위엔밍(陶淵明)의 「음주(飮酒)」에서 시인이 ‘생활을 걱정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경향을 긍정하였고, 심지어 “시가 법도로 삼을 것은 인생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고립된 생활이 아니라 가족과 국가 및 사회 속에서의 생활이다”라고 하면서 인생과 국가 및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량치차오와 왕궈웨이의 문학관을 지양․종합하여 보다 완정한 현대적 문학관을 세운 사람은 이후 ‘현대 문학의 조류를 지도’한 루쉰과 저우쭤런(周作人)이었다. 그들은 1908년에 발표한 「악마파 시의 힘에 대해(摩羅詩力說)」와 「문학의 의의와 사명 그리고 중국 최근 문론의 실책을 논함(論文章之意義及其使命因及中國近時論文之失)」에서 문학 예술과 민족의 흥망 성쇠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그들은 “문학은 그것에 국민 정신이 기탁하는 것이고”, “문학이 혁신되면 사상은 편안해지고 국민 정신은 아름답고 위대한 데로 나아갈 것이니, 이는 미래의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저작의 극치는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데 있으니 흥취를 느끼게 하고 미감이 있어야 한다”라는 ‘순수예술파’와 “문장의 절묘함은 자기 고백에 있고” “그것을 빌어 작가의 심리 상태를 볼 수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자아 표현파’의 문예관을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문장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상이 담겨 있고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미적 정취가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고, 문학의 기능은 “인간의 이상을 함양”시키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중간 자취”로서의 “이미지, 감정, 멋의 세 가지”를 “매개로 삼아”야만 비로소 “오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문학에는 단지 ‘간접적 기능’만 있을 뿐 ‘비실용적’이므로, 민족 정신과 국민 영혼에 대해서도 점차적인 훈도와 영향을 통해서만 민족을 진작시키는 공리적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다. 만약 “권선징악을 기준으로 세워” 분명한 실용적 효과를 추구한다면 문학은 ‘가장 협애한 지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루쉰과 저우쭤런은 여기에서 시대와 민족의 역사적 발전이 문학에 제출한 객관적 요구를 문학 자체의 법칙과 유기적으로 통일시켜 ‘민족 영혼 개조’를 중심으로 삼아 시대적 특색과 민족적 특색을 갖춘 완정한 문학관을 형성하였다.
저우씨 형제가 금세기 초에 제출한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관(강조-원문)은 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적인 문학관을 개괄하고 있다. 역사와 문학의 각 발전 단계에서 끊임없이 발전하였고 각종 변형태가 출몰하였으며 계급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작가 사이에 여러 가지 고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정신은 금세기 중국 현대 문학의 총체적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지배하였다. 현대 문학의 위대한 개막으로서의 ‘5․4’ 문학 혁명에서 우선적으로 강조된 것은 문학 혁명과 사상 혁명의 밀접한 관계 및 문학의 사상 계몽적 기능이었다. 루쉰은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말했다.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10여년 전의 ‘계몽주의’ 사상을 품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것은 ‘인생을 위하고’ 이 인생을 개량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의 소설을 ‘소일로 읽는 책’이라 하는 것을 깊이 증오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소일거리’의 신식 별칭에 불과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병태적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 속에서 제재를 많이 취했는데 그 의도는 병고를 들춰내어 치료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있었다.
루쉰을 대표로 하는 5․4 작가들은 문학의 계몽 대상을 하층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민족의 기초를 이루는 대다수를 환기시키는 것, 다시 말해 하층 인민의 각성을 문학의 기본적 임무로 삼음으로써 ‘민족 영혼 개조’ 문학관의 틈실한 사회적 기초를 획득하였다.
5․4 시기 창조사(創造社) 작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소리 높여 외쳤는데, 사실 그 또한 ‘문학의 자각’을 표현하였고 동시에 문학의 ‘사회적 영향’을 중시하였다. 그들의 이상은 “구국 구민”의 “자각 속에서 생성되는 예술은 그 자체로 자신의 독립적인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중국의 전도에 대한 그 기능은 무한하다”는 것이었다. 5․4 이후 대혁명이 실패하기 전후에 루쉰을 대표로 하는 현대 문학 일세대 작가들은 문학의 사상 계몽 작용에 대한 과대한 환상이 엄혹한 계급 투쟁의 현실 속에서 파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문학에 위기가 발생하였다. 루쉰 및 일단의 작가들은 이로부터 맑스주의자 또는 맑스주의 동반자의 길로 나아갔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도하는 인민 대중의 정치 혁명에서 민족을 분발시키는 현실적 물질 역량을 발견하였다. 문학관에서는 “문학으로 건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는” 관념론적 이론틀을 지양하면서도 ‘민족 영혼 개조’의 합리적 핵심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노농 대중을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계급 공리주의적 요구와 결합하여 현대적 문학관의 주류가 되었다. 그후 마오저뚱은 「옌안 문예 좌담회에서의 연설」에서 맑스주의 문예 사상을 중국 문예 운동의 실제와 결합시켜 ‘문예는 노농병을 위하는’ 방향을 제기함으로써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저우쭤런을 대표로 하는 소수 작가는 ‘문학 무용’의 허무주의로 나아가 이른바 ‘순수 자아 표현’의 문학관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문학은 결국 민족 영혼의 마취제로 타락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매국노 문학이 되었고 그로 인해 강렬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진 중국 독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1930년대의 일부 자유주의 작가들은 정치와 거리를 유지하자는 문학 주장을 제출하였다. 이 점에 있어 그들은 금세기 초의 왕궈웨이의 문학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가 이처럼 혼란스러워진 것은 순전히 제도 문제가 아니라 인심이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기본 신념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성정을 도야”하고 “인심을 정화”하는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문학의 기능을 과장함으로써 현존 제도를 수호한 점에서 그들은 금세기 초의 량치차오와 놀랄 만한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민족 영혼을 ‘재창조’하는 문학의 기능을 중시한 것은 현대 문학의 기본적 문학관과 일치하고 있다. 과거에 우리는 자유주의 작가와 좌익 작가 사이에 문학과 정치의 관계 등의 문제에서 야기되었던 분기를 비교적 중시하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문학 사상의 계몽적 기능을 중시하는 등의 측면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소홀하게 취급된 것은 편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20세기 중국 문학, 특히 우리가 연구하려는 30년간의 현대 문학은 주요하게는 현대 중국의 반제 반봉건 민족 문학(강조-원문)이기 때문에 인민 내부의 각 계급 문학의 범주는 중요하고(특정한 역사 단계, 예를 들어 현대 문학의 둘째 10년도 매우 두드러진 지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종속적인 지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부르주아 문학의 모순과 투쟁을 현대 문학 발전의 주선으로 삼는 것은 분명 타당하지 않다. 현대 문학의 문학관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이라는 주도적이고 총체적인 문학관을 부각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 그 역사적 장점 및 불가피했던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민족 영혼을 개조’하는 문학으로서의 특유의 사상 계몽 성격은 현대 문학의 근본 특징이다. 그것은 현대 문학의 기본적 면모를 결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 문학의 기본 모순을 끌어내고 현대 문학의 발전을 추동하였으며, 아울러 이로부터 문학 제재․주제․창작 방법․문학 형식․문학 풍격 등에서 현대 문학의 기본 특징을 형성하였다.
(1) (제재와 주제)
민족 영혼을 개조하는 계몽 문학으로서 문학의 표현 대상은 반드시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인생이다. 금세기 초에 린수(林紓)는 서양 문학을 소개하면서 잉글랜드 작가 디킨즈가 “유명한 인사와 미인의 틀을 깨고 나와 하등 사회만을 전적으로 그렸다”고 극구 찬양하였고 디킨즈 작품의 가장 귀중한 점은 “기이하지 않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서술한 점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5․4시기에 저우쭤런은 커다란 영향을 미친 「평민 문학」에서 “우리는 영웅 호걸의 일과 재자 가인의 행복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 세간의 평범한 남녀의 슬픔과 기쁨, 성공과 패배를 기록하면 된다. 영웅 호걸과 재자 가인은 세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대부분이 평범한 남녀이고 우리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그리는 것이 보다 보편적이고 자신에게도 보다 절실하다”라고 하였다. 류반농(劉半農)은 「중국의 하등 소설」이라는 강연에서 세계 발전의 역사 조류에 유의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후의 세계는 협의의 귀족이든 광의의 귀족이든 모두 소멸할 수밖에 없는 추세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학에 대한 안목도 紳士派의 문학관에서 平民派의 문학관으로 전화해야 합니다. … 우리는 소설에 공력을 들일 때 하등 사회의 실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로부터 문학의 제재와 ‘주인공’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루쉰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소설의 주인공은 용감한 장군과 책사, 의적과 부패한 관리, 요괴와 신선, 가인과 재자였는데 후에는 기녀와 오입쟁이, 무뢰배와 노복의 무리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5․4 이후, 새로운 지식인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유럽․어메리카의 비바람 속에서 흔들림을 느꼈기 때문에 대부분의 단편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옛날의 영웅과 재자의 티를 벗지 못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문학은 “분명하게 탈바꿈”하여 “결코 영웅이 아닌” 보통의 노동자, 농민과 병사가 문학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루쉰은 인식하였다. 현대 문학의 제재 범위는 매우 광범하다 할 수 있다. 현대 중국 사회의 반식민지화 과정에서 거의 모든 계층이 겪었던 운명과 사상, 감정과 심리의 변화가 모두 현대 작가의 예술 표현의 영역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중국 민족의 각성 과정에서 차지하는 지식인의 위상 및 농민의 각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성격과 그 과정의 지난함으로 인해 작가는 지식인과 농민의 운명 및 그들의 상호 계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농촌 제재와 지식인 제재는 중국 현대 문학의 두 가지 기본 제재가 되었다.
루쉰은 금세기 초 문예 운동에 종사하면서부터 상호 관련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첫째, 가장 이상적 인성은 어떠한 것인가? 둘째, 중국의 국민성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 셋째, 그 병근은 어디에 있는가? 루쉰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사고와 탐색은 금세기를 관통하고 있고 이로부터 중국 현대 문학의 두 가지 기본 주제---‘이상적 인성’의 표현과 국민성의 약점 및 병근의 게시 및 비판---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기본 주제는 시기와 작가에 따라 상이한 중점과 변주를 형성하였다. 대체적으로 보아 5․4 시기의 문학은 보다 강렬한 비판성을 가지고 국민적 약점을 드러내는 주제가 두드러지게 전면에 부각되었고 작가는 대개 부정과 비판의 형식으로 자신의 이상을 정면으로 표현하였다. 작가가 긍정한 이상적 인물과 개성은 대부분 서양적 개성 해방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1930년대의 문학 주제는 표현의 다양화라는 발전적 추세가 출현하여 보다 복잡하고 풍부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작가는 각자의 정치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상적 인성’을 주조하였다. 맑스주의를 지도 사상으로 삼은 프롤레타리아 작가는 노농 대중의 현실 투쟁으로 들어가 ‘프롤레타리아 신인’을 찾은 반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작가 중 어떤 사람은 원시적인 문화의 전통이 비교적 많이 보존되고 신사조의 충격을 받지 않은 질박하고 예스러운 농촌 사회에서 ‘이상적 인성’을 발굴하였으며(선총원), 어떤 사람은 시민적 문화 전통에서 ‘이상적 인물’을 발견했고(라오서), 어떤 사람은 상승 시기의 서양 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규범에 맞추어 스스로의 이상 속의 ‘영웅’을 창조하였다(바진). 한편 비판적 주제는 프롤레타리아 작가 및 일부 민주주의 작가에게서 민족 성격의 병태를 조성하게 만드는 병태적 사회 및 병태적 전통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점차 전향되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첨예한 정치 비판적 색채를 띠었다. 일부 민주주의. 자유주의 작가는 5․4 시기의 ‘국민성 개조’의 주제를 계속 견지하여 심화시켰다. 항일민족해방전쟁 초기에 ‘민족 신인’의 전형을 창조하는 것은 정치 경향과 문화 배경이 다른 작가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항전 중. 후기에 국통구 및 일본군 점령구의 문학에는 비판과 폭로의 주제가 두드러졌다. 민족의 진보를 저해하는 민족의 고질에 대한 비판이건 사회 암흑의 폭로이건 모두 새로운 깊이에 도달하였다. 공통구의 문학도 사회 해방과 민족 해방이라는 현실 투쟁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신인’에 대한 예술적 전유와 표현이 보다 성숙해졌고 ‘농민 개조’의 주제도 심화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만한 것은 항일민족해방전쟁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고양되는 가운데 작가들이 그려낸 ‘이상적 인성’은 대개 중국의 전통적 도덕성이 매우 짙은 풍격과 모범을 갖추었으며 강렬한 서양적 개성 해방의 색채를 가진 인물이 오히려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어 더이상 ‘신인’의 지위와 특징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5․4에서 항전 시기까지 ‘이상적 인성’의 내용이 보여주는 전이 과정 및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나타난 도덕 관념, 가치 관념, 심미 관념의 변화는 깊이 있게 고찰해 볼 점이다. 그러나 현대 문학의 제재와 주제의 전체 역사의 발전은 현대 문학과 진보적 사회 사조 및 민족 해방 운동, 인민 혁명 운동의 긴밀하고 자각적인 광범한 연계를 충분히 표현하였다. 이것은 현대 문학의 중요한 문학 전통을 이루었다.
(2) (창작 방법---리얼리즘, 모더니즘, 로맨티시즘)
현대 문학의 ‘민족 영혼 개조’라는 계몽적 성격은 또한 문학 창작 방법의 선택을 결정하였다. 현대 문학은 자신의 역사 개막 시기에 서양의 각종 문예 사조, 창작 방법, 예술 유파를 광범하게 수입하였고 여러 가지 창작 방법을 시험하였다. 그런데 역사적 선택의 결과 서양의 현대 문학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던 모더니즘 문학이 중국에서는 주도적인 문학 조류가 되지 못하였다. 중국 현대 문학에서 리얼리즘 문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중국의 사회 역사적 상황과 문학의 계몽적 성격이었다. 사회의 대격동 과정에서 사회 모순이 유례없이 격화되었고 깊이 있게 현시 되었으며 이는 리얼리즘 문학에 풍부한 창작 소재를 제공하였다. 문학의 계몽적 성격은 문학의 기본 임무를, 인간을 기만하고 속이는 정신적 미몽을 타파하고 생활 본래의 생생한 면목에 따라 현실 생활을 반영하며 현대 중국 사회의 진실한 모순 운동을 드러냄으로써 현실 변혁의 열정을 격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과감하게 현실의 암흑(사회의 암흑과 인심의 암흑)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사실대로 묘사하되 결코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각성한 리얼리즘이 중국 현대 문학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으며 강고한 문학 전통을 형성하였다. 동시에 문학의 ‘민족 영혼 개조’적 성격은 또한 현대 문학의 리얼리즘이 필연적으로 루쉰이 십분 긍정했던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사람에게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는” “높은 의미에서의 사실주의”임을 결정하였다. 이는 “영혼의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 정신적 고통을 받게 한다”는 점에서 서양 모더니즘과 내재적인 공통점을 가지게 하였고 이로 인해 모더니즘의 창작 기법이 중국 현대의 리얼리즘 문학에 흡수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앞에서 서술한 ‘이상적 인성’의 추구는 중국 현대 문학이 동시에 이상주의적 색채를 띠게 하였고 따라서 로맨티시즘이 현대 문학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 현대 문학에서 주조를 이룬 리얼리즘 문학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창작 기법을 포용할 수 있는 개방적 형태를 취하였다.
(3) (내용과 형식---통속화와 현대화)
현대 문학의 ‘민족 영혼을 개조’하는 계몽적 성격은 문학의 내용과 형식에 두 가지 측면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하나는 문학의 통속성, 즉 문화 정도가 낮은 보통 민중이라는 계몽 대상에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을 요구하였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현대성, 즉 현대적 의식. 현대적 사유 방식․정감 방식을 표현하고 그것에 부응하는 현대적 예술 형식을 채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 의식․사유 방식․예술 감상 능력이 모두 몽매한 상태에 놓여 있고 저급한 단계에 처해 있는 독자를 현대화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현대 문학 발전 과정에서의 기본 모순이다. 이 모순은 문학 형식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언어 문자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만청 백화문 운동은 언어의 통속성을 강조하고 언문 합일을 추동하여 계몽의 책임을 다했지만, 새로운 사물과 개념을 나타내는 새로운 술어를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현대 의식과 현대적 사유 방식을 표현하는 데 커다란 제약을 받았다. 이에 대해 량치차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순수한 백화체로 논리적인 글을 짓는다면 가장 힘든 일은 술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만약 일일이 통속성을 구하다가는 의미가 천박해질 뿐만 아니라 부정확해진다.” 그러므로 량치차오는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였다. 한편으로는 외래어 및 외국 언어(특히 일본어)를 흡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문언(특히 추상명사)을 백화화시킴으로써 외래 사상이 중국의 원래 언어와 조화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였다. 5․4 시기 푸쓰녠(傅斯年)은 “유럽화된 백화문”을 “이상적인 백화문”으로 삼았고, 저우씨형제는 “딱딱한 번역(硬譯)”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방안은 통속성과 현대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해의 가능성’에 대해 장기간 논쟁되었다. 시가 형식 문제에 대한 쟁론과 탐색 또한 현대 백화문을 어떻게 운용하여 현대 중국인의 현대적인 시적 예술 사유 방식을 표현할 것인가 라는 지난한 예술적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후스(胡適)는 초기 백화시 이론에서 ‘통속화’ 문제를 우선적 위치에 놓고 “말하는 대로 쓸 것”을 강조하였고 글을 짓듯이 시를 씀에 외적으로는 언어 형식을 산문화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시의 예술 사유 방식도 산문식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해하기에는 쉽지만 시맛이 떨어지는 ‘후스체’라는 백화시를 만들어 냈다. 이후 상징파 시인들은 ‘순수’한 현대시를 창조하기 위해 “시적 사유 기술”과 “시의 논리학”을 발견하여 “시적 사유 방법으로 직접 사유하고 시적 선율을 가진 문자로 직접 묘사할 것”을 명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의 “현대화”를 강조한 점에서 “통속적이지 않다”라든가 “어려워 이해할 수 없다”라는 등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바로 문학의 통속화(및 그것과 상호 연계되면서도 일정한 차별점이 있는 대중화와 민족화)에 대한 요구와 문학의 현대화에 대한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의 대립 통일이 작가들의 장기간에 걸친 지난한 예술 탐색을 추동하였고 현대 문학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4) (작품의 사상성---인식 가치와 심미 가치의 불균등)
현대 문학의 ‘민족 영혼을 개조’라는 계몽적 성격은 현대 문학의 작품의 사상성(사상의 깊이와 넓이), 문학의 인식 가치․교화 작용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금세기 초에 ‘민족 영혼 개조’의 문학관이 형성되면서부터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개진되었다. “문학이라는 것은 인생과 사상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상성의 추구를 방기하면 “형식만 두드러지고 내용적 의미는 없어진다.” 즉 문학이 쇠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가는 “반드시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중국 대부분의 현대 작가(혁명 작가에 국한되지 않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문학가들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혁명가․사상가․작가 또는 학자와 작가, 혁명가․학자․작가의 삼자가 합일된 품격을 동시에 겸유하였고, 그들의 정치 활동․학술 활동․문학 활동은 대개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철학․정치학․윤리학․역사학 … 등이 그들의 문학에 스며든 것은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문학 전반에 걸쳐 이성적 비판 정신과 탐색 정신이 충만하였다. 특히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흥기한 이후, 혁명 이론의 창작에 대한 지도 작용이 강조되었고 선명한 사상적 경향성이 요구되면서, 명확한 목적성을 가진 자각적인 창작이 현대 문학 창작의 주도적인 경향이 되었다. 현대 문학의 이와 같은 역사적 특징은 그것이 담당했던 사상 계몽의 역사적 사명과 통일되고 일치된 것으로서, 역사적 필요성과 합리성, 그리고 적극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비예술’적인 것이 예술의 영역으로 쉽게 비집고 들어와 예술 역량에 직접적으로 해를 끼쳤으며 문학의 심미 가치를 저하시켰다. 현대 문학사에서 예술 자체의 추구를 스스로 방기하여 문학 예술을 일반 정치 선전물과 동일시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현대 문학 창작에서 작품의 인식 가치와 심미 가치의 불균등은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우리에게 사상과 예술이 완미하게 결합된 예술 진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총체적으로 보면 현대 문학의 인식 가치가 심미 가치보다 높다는 것은 은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현대 문학의 특유한 역사 과도기적 성질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중국의 수천 년의 역사가 창조한 고전 문학으로부터 세계의 선진 대열에 위치한 현대화한 중국이 창조할 미래의 신세기 문학으로 통하는 교량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2. 중국 현대 문학과 전통 문학․세계 문학의 종적․횡적 연계(민족성과 세계성)
이상으로 우리는 중국 일국의 각도에서 현대 문학이 생성된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 및 이로 인해 결정된 현대 문학의 기본적 성격과 특징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20세기 세계(세계 문학을 포함하여)는 하나의 통일체가 되었고 어떤 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은 그 국제 환경과 뗄 수 없으며 세계적 범위에서의 상호 영향과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금세기 초에 “오랜 세월 완전히 정체되었던 국가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지던” 중국의 각성과 아시아의 각성은 “20세기초에 열려진 전세계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표지한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의 각성의 산물로서의 현대 문학 역시 그 의의는 중국 일국의 범위를 초월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 각도에서 중국 현대 문학 생성의 문화적 배경을 고찰해 보면 현대 문학은 바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교차점에서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국 문학은 장기간의 발전 과정에서 민족 특유의 미학 원칙과 문학 전통을 형성하였으며, 서양 문학의 각종 장르, 예술 형식, 표현 기법, 창작 방법도 비교적 충분하고 성숙하게 발전하였다. 동시에 중국 문학과 서양 문학은 모두 문학 발전의 고조기가 이미 지나가고 새로운 돌파와 변혁을 준비하는 단계에 처해 있었다. 역사의 전변 시기에 ‘중국 중심론’과 ‘서양 중심론’이라는 자아 집착의 타파는 상호 교류를 통해 상대방에게서 문학 발전의 새로운 동력을 흡수하려는 역사적 요구를 형성하였고 아울러 이러한 교류와 충돌 과정에서 통일적인 세계 문학을 형성하였다.
굳게 닫혔던 중국의 대문이 1840년 서양의 군함과 대포에 의해 열렸지만 서양 문학이 진정으로 대량 유입되고 중국 전통 문학에 충격을 준 것은 1898년 무술변법 전후였다. 특히 1897년부터 린수가 서양의 문학 명작을 대량으로 번역 소개한 것은 중국 사상계와 문단을 진동시켰고 중국 현대 문학의 일세대 작가를 직접적으로 배양하였다. 서양의 문학 작품은 중국의 전통적 봉건 문학과는 이질적인 완전히 새로운 문학으로, 그것들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이미 성숙해진 중국의 문학 변혁의 요구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였고, 아울러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서양 문학의 모범을 제공함으로써 전통 문학을 혁신할 수 있는 전면적이고 새로운 역사의 길을 닦았다. 량치차오를 대표로 하는 부르주아 개량파의 사상가들은 서양 문학의 중국 전통 문학에 대한 충격력을 이용하여 문학 개량 운동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채용한 노선은 여전히 ‘중학위체, 서학위용’의 노선, 즉 중국 봉건주의 구문학의 기본틀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키지 않는 전제 아래 일부 서양 문학의 새로운 술어, 개념, 기법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린수는 서양 소설이 “모두 (중국-옮긴이) 고문의 의법(義法)을 체득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중국 전통 문학으로 서양 문학을 개조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개량주의 노선 아래 량치차오 등이 발동시킨 문학 개량 운동이 완전히 새로운 현대 문학을 탄생시킬 수 없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5․4 문학 혁명이 중국 현대 문학의 빛나는 기점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봉건주의 구문학을 비판하면서 조금도 모호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굳건한 태도로 서양 문학을 흡수, 차감하고 세계 문학과 긴밀한 연계를 획득한 점에 있다. 전체 5․4 문학 혁명은 먼저 문학 형식의 변혁을 돌파구를 삼은 후 다시 문학의 내용과 문학관(념)의 변혁으로 확장되었다. 문학 형식의 돌파의 관건은 소설, 시, 희극, 산문 등의 서양 문학 형식의 수입이었는데, 이는 단순한 형식의 수입에 그치지 않고 문학 형식을 외피로 하는 예술 사유 방식, 문학관(념), 식견 등을 포함하였다. 아울러 그것이 야기시킨 문학 변혁도 문학관(념)으로부터 문학의 내용과 형식 등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이었다. 서양 문학의 수입 및 세계 문학과의 폭넓은 연계는 중국 전통 문학의 변혁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였다. 다른 이질적 문학 체계와의 비교 관찰을 통해 새로운 문학관(념)에서 새로운 연구 안목을 획득하였고 현대화된 과학적 연구 방법을 흡수함으로써 사람들은 전통 문화의 유산을 새롭게 인식하였고 새롭게 발굴하였다. 5․4 시기에 루쉰과 후스가 전통 소설 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돌파는 그 좋은 예이다(그 이전에도 왕궈웨이의 중국 전통 희곡과 홍루몽 연구의 돌파가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전통 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발굴한 선구자들은 바로 봉건주의 구문화를 반대하고 외래 문화를 학습하자는 기치를 높이 든 5․4 문학 혁명의 선봉장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양 문화를 수입하고 세계 문학과 공통된 언어를 획득하는 것이 결코 민족 문학적 전통과 개성의 소멸을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민족화와 개성화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설명한다. 루쉰은 역사가 부여한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과학적으로 개괄하였다. “새로운 형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고 “내외 양면으로 세계의 시대 사조와 합류하되 중국의 민족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나아가 세계의 사업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루쉰이 지적한 것은 세계 문학의 조류, 시대의 조류, 민족적 전통, 작가의 개성의 네 가지의 결합이다. 이는 물론 대단히 높은 기준이다. 그러나 중국 현대 문학은 확실히 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시대와 개성이라는 모순 외에 문학의 세계성과 민족성의 대립 통일은 현대 문학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의 기본 모순 또는 기본적 예술 과제였다.
대체적으로 보아 5․4 시기에 중국 문학과 세계 문학이 공통 언어를 획득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구는 전명(前面)에 부각되었다. 동서양의 각종 문예 사조, 유파, 작가 작품을 폭넓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및 피압박 민족의 문학이 특히 중시되었다. 1930년대 ‘문예 대중화’ 토론의 심화에 따라 현대 문학과 민족 문학 전통의 비판적 계승의 관계, 구형식 이용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문학과의 연계가 계속 발전되면서 소비에뜨 연방의 문학과 서양 진보 문학의 영향이 나날이 증가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항일 민족 해방 전쟁시 문학의 민족 형식 문제는 작가와 이론가의 주의를 끄는 중심 문제였고, 공통구에서 현대 문학 종사자 및 신문예 종사자와 민족의 주체인 농민이 최초로 ‘대화’를 하였고 민간 문학의 가치가 새롭게 확인되고 높게 평가됨으로써 현대 문학의 민족화를 새롭게 추동하였다. 정치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의 제약 때문에 공통구 문학은 소련 문학 이외의 세계 문학과는 격절되었는데, 이는 공통구 문학 및 건국 이후의 문학에 소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국통구에서는 서양 문학과 러시아 소련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붐이 일어났다.
30년 동안의 역사 발전을 통해 중국 현대 문학은 마침내 세계 문학과의 횡적 연계 및 민족 문학 전통과의 종적 연계를 건립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문학 창조로 민족 문학 전통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세계 문학의 발전에 독특하게 공헌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적인 가치와 지위를 획득하였다. 외국 문학의 충격력의 도움을 받아 중국 민족의 전통 문학을 변혁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현대 민족 문학의 참신한 특색으로 세계 문학에서 자신의 위치를 획득하는 데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중국 현대 문학이 걸어온 길이며 30년 역사의 총결이다.
(92.4 1차 교정, 5.18 2차 교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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