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List

레이블이 자본주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자본주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8월 13일 수요일

자본주의만 고발하기도 벅찼던 공동체에 대한 이상화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812011
▲  SBS <최후의 제국>의 한 장면
ⓒ SBS

마이클 무어는 2008년 <식코>를 통해 미국 의료보험 체계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리고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최대 무기는 바로 이 의료개혁이었다.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확장시켜 서민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이면을 까발린다. 

골드만삭스와 리먼브러더스 등 월가의 나태와 부정 탓에 촉발된 미국발 금융․경제위기를 들여다보며, 신자유주의가 신봉하는 자본주의의 축복과 대다수 미국 국민의 '공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확실히 한 것이다. 이를 가로지르는 문제의식은 하루도 빠짐없이 'God'을 외쳐대는 미국인들의 자본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나눔'의 가치를 철저하게 배격한다는 회의와 절망이다. 그리고 마이클 무어는 민주당 오바마 정부의 출범에 주목했다. 

9일 막을 내린 SBS 4부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은 마이클 무어가 선취한 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좀 더 확장시켰다. 이 다큐는 미국을 비롯해 1%를 위한 자본주의의 폭주에 신음하는 세계의 '보통' 사람들과 '자본주의의 눈'으로 봤을 때 세계의 끝자락에서 미개한 삶을 사는 부족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본주의가 회복해야 할 가치를 묻고 또 묻는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그 물음의 선의만큼은 꽤나 유의미했다. 

▲  SBS <최후의 제국>의 포스터
ⓒ SBS

미국과 중국, 히말라야와 태평양 오지를 가로지르는 SBS의 대기획 

제작진은 프롤로그에서 중국 상하이와 <오래된 미래>의 히말라야 오지 라다크 마을, 미국의 오하이오주와 솔로몬제도 아누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횡단을 감행한다. 그곳에서 벼락부자가 돈을 주고 자식을 먹일 모유를 사는 신흥 강국 중국의 이면을 확인한다. 그리고 꽃을 사랑하는 브록파 부족 사람들의 아름다운 축제도 조망한다. 그다음엔 5명 중 1명의 아이가 굶고 출석하면 돈을 주는 미국의 빈곤층과 아누타 섬 사람들의 나눔과 협동의 정신인 '아로파'가 기다리고 있다. 

먼저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카메라를 들이댄 <최후의 제국>은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고 선언한다. 공화당의 롬니를 지지하는 억만장자의 삶과 홈리스 센터에 넘쳐나는 빈민층의 눈물겨운 일상. 그리고 지상최대의 낙원이라는 라스베가스 지하 배수구에 살고 있는 300명의 사람들. 금융위기와 함께 집을 잃고 차에서 생활해야 하는 가장의 처참한 생활고와 절망까지. 

제작진은 또 17년 전 파푸아뉴기니 상각부족의 '빅맨'에서 미국인 아내와의 결혼과 함께 미국의 중산층이 된 넨의 혼란을 보여준다. "돈이 없으면 인생도 없는" 나라 미국과 넨의 고향인 파푸아뉴기니의 공동체적인 삶을 비교하는 건 당연한 순서다. 여기서 되짚는 것은 몰락한 중산층을 두 번 죽이는 미국의 현 복지체계와 이를 당연시하는 공화당, 그리고 속수무책인 현 미정부의 리더십이다. 

이러한 패턴은 결혼 시장에 '몸'을 파는 중국 여성들과 라다크 부족의 '해피 바이러스'를 비교하는 3부에서도 지속한다. 그리하여 4부에 이르러서는 유럽 스페인 등지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협동조합을 통해 공동체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의 싹을 엿보기도 한다. 그 끝엔 물론 아누타 섬 사람들이 간직한 나눔과 협동의 순수함이 자리한다. 자본주의가 갉아먹어 버린 '휴머니티'의 어떤 정신이 아직 살아 있는 그 곳 말이다. 

▲  <최후의 제국>의 나레이션을 맡은 배우 이병헌. 이병헌은 차분한 목소리와 호소력 있는 나레이션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 sbs

<최후의 제국>이 부족했던, 마이클 무어에게 배워야 할 그 무엇

이렇게 자본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는 <최후의 제국>은 그러나 뼈아플지언정 신랄하지 않다. 냉소적이기보단 오히려 담담해 보일 지경이다. 미국, 중국에서 히말라야 산자락, 태평양 오지 끝까지 무려  65,000Km의 대장정을 카메라에 담아서일까. 마치 제작진은 스스로 마주한 자본주의의 나락과는 달리 오지에서 발견한 '가치'를 통해 망가진 자본주의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느냐 역설한다. 

그러니까 "무엇이 세상의 끝자락에서 이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란 물음에 이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아로파는 정녕 불가능한 것이냐"는 문제 제기는 유의미할지언정 공허하다. 제작진도, 시청자도 이 망가지고 고장 난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미국에 끝끝내 저항하는 북한 역시 극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하나 마나 한 질문은 현답을 이끌어낼 수 없는 법이다. '나눔'과 '공동체'의 일정적인 대안으로 제시된 '협동조합'(한국에서도 이미 도입된)의 의미가 축소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상적인 가치만 내세울 뿐 현실적인 대안도, 또 다른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는 이 다큐멘터리가 지속해서 오지의 공동체를 이상화시킬 때, 그 망가진 자본주의 우산에서 함께 신음해야 하는 이 땅의 시청자들 역시 허탈할 수밖에 없음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제작진의 고생과 강조에도 아랑곳없이) 이 <최후의 제국>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전히 미국 빈곤층들의 지금 삶이다. 출석을 한 학생들에게 돈을 주는 학교, 모텔촌에서 살며 강도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나 나올 법한 지하 생활자들. 이들의 삶을 조명하며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을 깨부수는 동시에 우리에게 닥칠지 모를 복지체계 붕괴의 심각성을 부각했던 장면들 말이다.   

앞서 EBS에서 방영된 <킹메이커>는 과거 미국과 러시아의 선거 조작과 견고한 중도파 프레임, 그리고 오바마의 선거 전략을 통해 우리의 대선 정국을 돌아보게 하는 수작 다큐멘터리였다. 뒤이어 대선에 앞서 한 달간 방영된 <최후의 제국> 역시 리더십과 복지체계,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하나 이 공을 들인 다큐멘터리가 경각심과 문제 제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채로 '미래'에 대한 공명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점은 자못 아쉬움으로 남을 법하다. 블록버스터 다큐에 버금가는 이국적 볼거리와 '공동체적 가치'에 선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재를 접목한 야심 찬 기획을 인정한다 해도 말이다. 

'악동'이자 '선동가' 마이클 무어가 세계의 다큐 감독들에게 미친 영향은 폐해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펼치려는 주제에 맞는 형식과 그에 걸맞은 논리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최후의 제국>은 그런 점에서 너무 방대하거나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  

다만 같은 시기, 그리스의 경제몰락을 복지 포퓰리즘이란 단선적인 관점에서 밀어붙인 '망작'을 내놓은 <MBC스페셜>과 비교했을 때, SBS <최후의 전쟁>은 <킹메이커>와 함께 '올해의 다큐' 중 한 편으로 꼽힐 만한 시도를 보여준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또 하나,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목소리와 호소력을 선보인 나레이터 이병헌만큼은 분명 '올해의 발견' 감이다.

2014년 8월 7일 목요일

충칭모델, 신좌파, 중국의 미래 -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추이즈위안/ 돌베개)

충칭모델, 신좌파, 중국의 미래

[책소개]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추이즈위안/ 돌베개)



By   /   2014년 3월 2일, 12:28 PM  
Print Friendly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후 20년,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난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는 중국 지도부가 주요 정책 방향을 발표함으로써 이후 중국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회의였다.
1978년 열린 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이 채택되었고, 1993년 14기에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공식화한 바 있다. 이번 3중전회 또한 중국의 새로운 성장모델과 개혁안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국유경제를 양립하겠다는 절충안에 그쳤다.
하지만 이 회의는 그간 중국사회의 문제로 줄곧 제기된 쟁점들을 전면화함으로써 중국의 향후뿐만 아니라 그간 중국이 지나온 길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국유기업 개혁, 반부패 정책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민생문제들, 즉 도시.농촌 격차, 농민공(농촌 출신으로 도시에 와서 일하는 노동자. 중국은 엄격한 주민등록제를 시행해, 도시 주민등록이 없는 농민공에게는 복지 혜택을 주지 않는다.)을 비롯한 도시빈민의 교육.주거.의료문제, 주민등록제(후커우)문제, 토지개혁 등이 논의되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확립 이후 20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구호로 내세우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 유지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앞서 언급한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했다.
특히 거대 국유기업을 위시한 특권층은 막대한 부를 독점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성장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은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다.
프티부르주아
이른바 ‘충칭모델’
1990년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돌출된 흐름이 이른바 ‘신좌파’이고, 이후 이들의 이념에 바탕해 중국 서남부의 대도시 충칭에서는 국유자산과 시장원리가 독특하게 결합된 경제.사회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른바 ‘충칭모델’이라 불리는 것으로, 시장개혁론에 입각해 국가의 지나친 개입을 반대하는 ‘광둥모델’과 대비되는 발전모델이다.
2012년 중국 최대의 정치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보시라이는 ‘중국 좌파의 영웅’이었고 충칭의 당서기였다. 보시라이 실각 이후, 충칭모델과 신좌파의 목소리가 뒷전으로 밀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던 것도 사실이지만, 충칭시 시장 황치판은 18기 3중전회에 제출된 중대한 개혁방안의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도대체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의 대표적인 신좌파 지식인이자 충칭 제도개혁에 깊이 관여한 바 있는 추이즈위안은 이러한 중국의 상황에 대해 과감한 분석과 대안을 들려준다. 그는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를 사상적 입지로 삼으며, 중국적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충칭의 경험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작업을 시도한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돌베개, 2014)는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창비, 2003) 이후 11년 만에 국내에 소개되는 추이즈위안의 저작이다.
서구의 프레임 밖에서 중국 현실에 대한 독자적인 사유를 모색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텍스트를 선별한 ‘현대 중국의 사상과 이론’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원톄쥔의 <백년의 급진>에 이은 두 번째 책.
중국의 경험과 진보적 이론들을 종횡하는 실천의 궤적
현재 중국 칭화대학 공공관리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추이즈위안은 중국 신좌파 지식인 그룹의 대표적 이론가이다. 중국 국방과학기술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다양한 사상적 자원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추이즈위안은 1990년대에 중국적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제도적 혁신에 관한 글을 발표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사회가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고수했으며, 정치적 구호로 치부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는 중국의 개혁이 신자유주의에 맞서려면 사회주의적 경험의 합리적 요소를 살리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나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사회민주당은 급진적인 영감을 일찌감치 잃어버렸다. 사회민주당의 강령은 기존 시장경제 체제의 형식에 도전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의 구조적 격차와 계급계층 제도로 인한 후유증을 완화시키는 데 치중한다.”(24쪽)
그래서 그는 프루동,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 헨리 조지, 실비오 게젤, 제임스 미드, 로베르토 망가베이라 웅거 등의 진보적 이론들을 흡수하여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자유사회주의)의 흐름을 복권해내며, 그러한 시야 속에서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분석한다.
여기에는 물론 중국의 현실적 경험, 페이샤오퉁과 장펑춘 같은 중국 현대 사상가들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홍콩 등 다른 국가의 제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뒷받침되어 있다.
추이즈위안은 중국의 농촌 토지소유제도, 향진기업, 국유기업제도 등에서 이 새로운 사회주의의 싹을 발견해냈으며, 충칭의 실험에서 자신이 주장한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가 하나의 체제로 실현될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당시 충칭시 시장이었던 황치판의 제안으로 2010년 5월부터 충칭시 국유자산관리감독위원회에서 일하며 정책개혁에 참여했다.
이처럼 추이즈위안의 궤적은 비서구사회인 중국에서 가능한 보편적 이론 생산의 한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해제에서 류준필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추이즈위안은 이른바 서방의 기준으로 중국의 현실을 판단하는 시각을 경계하는 한편,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적 존재 양상과도 구분되는 중국적 현실과 경험의 독자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서구의 전통에 내재된 요소들을 당대 중국적 현실을 해명하는 데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201쪽)
추이즈위안은 중국의 현실에 바탕을 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서구 사상의 전통적인 요소들과 동시대 사상들을 종횡하며 진보적인 이론을 재구성한다. 또한 충칭실험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사회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검토·재해석하고 직접 정책생산 과정에 개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기록이 담긴 추이즈위안의 글들은 서구 이론과 중국의 현실, 보편과 특수, 이론과 제도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촉발한다. 이론이 한 시대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자 응답임을 환기시키는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은 한국의 학자와 정책 관계자들에게도 풍부한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자유사회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신국제주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에 수록된 글들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자유사회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신국제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헨리 조지, 제임스 미드, 안토니오 그람시: 충칭개혁의 세 가지 이론적 관점」「‘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경제학적 함의에 대한 재인식」「‘충칭의 경험’과 제도혁신」 등 네 편의 글은 프루동과 존 스튜어트 밀에서 제임스 미드에 이르기까지의 ‘자유사회주의’ 이론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개혁 경험, 특히 충칭의 실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한편,「‘혼합헌법’ 그리고 중국정치의 세 층위 분석」은 ‘공화주의’ 시각에서 중국의 정치개혁을 탐구하며, 「‘아시아적 가치’ 대 ‘서구적 가치’라는 사유방식을 넘어서: 인권문제를 보는 시각」「제3세계에서 서구중심주의와 문화상대주의의 초월」「시바이포 포스트모던: UN인권선언과 보편적 역사의 여명」은 민족주의와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적 발전을 기원하는 ‘신국제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의 전통과 그 의의를 과감하게 재구성한「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에서 추이즈위안은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를 ‘자유사회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중국 및 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경쟁할 것”이라는 야심을 내비친다.
그가 이야기하는 프티부르주아(소자산 계급)는 ‘중산 계급(중산 계층)’이라는 개념과 다르며, 당연히 농민을 포함한다. 그에 따르면,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경제적 목표는 개혁과 기존 금융시장 체제의 전환을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며, “정치적 목표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 대립 없이 모든 시민이 공동의 부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강조한 덩샤오핑의 ‘소강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추이즈위안은 현대 중국의 토지소유제, 기업제도 등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대안적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설명하며, 여러 이론가들의 논의를 오가며 금융과 노동과정, 소유권 개혁 등 제도혁신과 관련된 아이디어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이즈위안의 구상이 현실에 가깝게 구현된 곳이 바로 충칭이었다. 「헨리 조지, 제임스 미드, 안토니오 그람시」「‘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경제학적 함의에 대한 재인식」「‘충칭의 경험’과 제도혁신」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관한 의미 있는 실천으로서 충칭 제도개혁을 맥락화해낸다.
충칭실험의 핵심은, 정부가 토지와 기업을 공유자산으로 소유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지가 상승 수익과 국유기업의 시장 수익을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높은 세율 없이도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해 민간부문의 발전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민생을 지원해왔다.
또한 지표거래제도의 시행과 주민등록제(후커우) 개혁을 통해 도농 통합발전을 촉진하고, 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공’들이 도시주민과 동등하게 공공임대주택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충칭시 정부는 삼진삼동, 빈농 자매결연, 민생 대탐방 등의 제도를 통해 간부들이 인민에게 봉사하도록 독려했다.
추이즈위안은 이러한 충칭의 제도개혁에 대해 헨리 조지, 제임스 미드, 안토니오 그람시 등의 이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은 충칭개혁 이론가의 언어를 통해 중국을 뜨겁게 달군 충칭의 경험을 다각도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중국이 겪고 있는 첨예한 문제들, 그리고 그것을 돌파하는 사유와 실천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추이즈위안은 공산당 중심의 관료주의와 국가주의의 위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탐색하고,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와 중국 민족주의를 넘어선 신국제주의 이념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문제를 해결해고자 하는 충칭의 혁신적인 실험과 추이즈위안의 이론화 작업은 중국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소중한 교훈을 전달한다. 이 책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은 국가의 역할, 자본주의 너머의 정치, 좌우라는 경직된 이념을 넘어서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재구성을 고민하는 한국의 진보적 독자들에게 신선한 지적 자극을 줄 것이다.

서평] 현대 중국 지식인지도 - 중국의 고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중국연구실허난시 03/30

중국의 고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중국연구실허난시 03/30 22:44
황해문화 2014년 봄호에 실은 서평 하나를 옮겨봅니다. 

"중국의 고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조경란/글항아리 2013) 서평

21세기 들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국가는 바로 중국이다.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기업, 미디어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국을 열광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마치 예전 로코코 시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중국풍(chinoiserie)’의 재림이라고 보고 ‘중국열풍(Sinomania)’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상하는 중국이 과연 어떻게 변해나갈 것이며, 또 중국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켜 나갈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중국이 현재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앞으로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토론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논의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출간된 조경란 선생의 저작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글항아리, 2013)는 최근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의 변화와 그들 간의 논쟁들을 꼼꼼히 추적하여 현재의 중국 지식계를 입체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중국 지식인들이 모색해온 사상의 궤적을 추적한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삼인, 2003)과 이를 더 심화시켜 21세기 초입까지의 중국 지식계의 논쟁과 입장 변화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탐구한 [현대 중국 사상과 동아시아] (태학사, 2008)에 이어 좀 더 대중적으로 최근 중국의 부상에 따른 중국 지식계의 변화 경향을 나름 한국적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는 서구의 중국학계에서 비슷한 주제를 가진 저작들이 대표적인 중국 지식인들의 글들을 단순히 요약번역하여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과 비교해볼 때 매우 뛰어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방대한 문헌을 검토하여 복잡한 사상적 자원을 지닌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를 효과적으로 정리해낸 노력이 담겨있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소개하자면, 저자는 중국 지식계가 21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을 기점으로 다시 새롭게 분화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중국 지식인들이 자국의 성공적인 경제성장과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상승을 ‘중국모델론’으로 이론화하기 시작하는 한편, 서구의 제도를 비판하고 중국의 전통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중국 지식인들의 ‘국가주의’로의 경도라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 지형 재편의 중심에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의 시장화와 불평등 확산을 강하게 비판해왔던 신좌파의 ‘국가주의’로의 선회(보수화)가 있으며, 이에 호응하는 신유가의 중국의 유가 전통 재해석이 결국에는 ‘중국모델론’과 ‘유교중국’의 수렴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를 중국 정부가 소프트파워 구상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유주의 지식인들 역시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자유주의의 중국화를 고민하는 한편, 기존의 네거티브한 체제비판을 넘어 적극적인 권리찾기 운동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늘리는 등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듯 저자는 중국 주류 지식계(특히 신좌파)가 국가주의와 중화주의에 함몰되는 것을 비판하는 동시에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며 독립성을 모색하는 지식인을 바람직한 비판적 지식인의 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중국에 대한 태도도 ‘숭중(崇中)’과 ‘혐중(嫌中)’을 넘어 중국을 객관적으로 연구분석하는 ‘연중(硏中)’과 비판하는 ‘비중(批中)’이 필요함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논의에 전반적으로 공감하지만, 몇 가지 쟁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국 신좌파들이 국가주의로 경도되어 보수화했다는 평가는 아직 유보적으로 판단해봐야 할 문제는 아닌가 하는 점이고, 다음으로 기존의 이데올로기 중심의 지식인 분류가 한편으론 중국 지식계의 복잡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전형적인 틀로 정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이며, 그 연장선에서 바람직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을 독립/관방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중국 지식인들은 국가주의로 함몰되고 있는가?

저자가 지적하듯이 중국 신좌파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공산당 및 국가에 더욱 친밀성을 드러내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이를 신좌파들이 보수화했다거나 국가주의로 침윤되었다는 평가는 약간 과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신좌파 내부에도 스펙트럼이 다양한 편이라고 할 수 있고, 신좌파로 분류되던 지식인들이 기존의 '신자유주의 비판-세계화 비판'이라는 공동전선 - 특히 구체적으로 중국의 WTO가입 반대나 국유기업 구조조정, 빈부격차 확대 비판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던 논쟁의 전선 - 에서 후진타오-원자바오 집권기에 중국의 정책에 미묘한 변화 - 즉 한편에서 지속적인 시장화는 추구되지만, 또 한편에서 농업세 폐지나 노동계약법 제정, 최저임금 인상 등을 비롯한 친민정책들도 시도되는 등의 변화 -가 나타나자 그에 맞춰 입장들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예를 들어 신좌파로 분류되는 왕샤오광(王紹光)은 지식계나 정책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계기도 1993년 중앙 정부의 역량을 강화할 것을 제언하는 [국가능력보고]였고, 본인 스스로를 국가주의자로 호명해온 경향이 있지만, 추이즈위안(崔之元)이나 왕후이(汪暉)의 경우에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기층 인민의 밑으로부터의 목소리를 통해 국가에 개입하고 국가를 압박하여 친민정책을 끌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이를 ‘국가주의자’라고 단정짓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저자의 주 비판대상이 되는 왕후이를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최근 왕후이의 핵심 주장인 당국가론은 야오양(姚洋)의 중성국가론을 수용하여 중국이라는 국가가 어느 특정 계급을 대표 한다기보다는 중국의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왔고 이것이 개혁개방의 성공의 조건이었다고 보는 저자의 해석은 약간 오해가 있는 듯하다. 저자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국가주의로의 함몰로 평가받고 있는 왕후이의 문제의 논문 “중국 굴기의 경험과 도전”(황해문화 2011년 여름호)을 읽어보면, 마치 야오양의 중성국가론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세세히 구절을 따져가며 읽어보면, 도리어 왕후이는 야오양의 중성국가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야오양은 신좌파들과는 달리 케인즈주의나 자유주의에 친화적인 경제학자인데, 그의 중성국가론, 더 정확히는 ‘중성정부론(Disinterested government)’은 말 그대로 중국의 개혁개방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가 어떤 이익집단의 편도 들지 않고 중국 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실용적인 정책(즉 시장화와 자유화)을 채택한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 굳이 스펙트럼을 구분하자면 발전국가론과 자유주의적 해석의 절충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중국이 나갈 방향에 대해서도 이 입장에 근거해 국가의 지나친 개입도 완전한 방만도 아닌 실용적인 선택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왕후이의 정당-국가화 테제는 196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공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정당들이 각자의 정치적 가치를 상실하고 국가기구로 함몰되어 결국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국가의 동원기구로 전락하는 현상(대의정치의 한계), 즉 “정당-국가 체제”에서 “국가-정당 체제”로 변화하고 있는 탈정치화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당연히 밑으로부터의 목소리가 커져야 하고 이론 및 노선 투쟁이 재점화되어야 하며,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을 따라 중국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기층 인민들의 목소리였고 이를 반영한 당 내부의 이론 및 노선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국가의 중립성을 먼저 전제하고 이익집단으로부터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야오양의 중성국가 논의와 민간의 비판역량이 국가의 중립성을 견인한다는 왕후이의 논의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왕후이는 야오양의 논의를 평가하면서, “국가의 중립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힘들과 그 상호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특히 “30여 년의 개혁을 지나오면서 시장화개혁의 추진자로서 국가기구는 시장의 활동에 매우 깊게 묻혀들어 갔기” 때문에 “‘중성국가’의 개념으로 오늘날의 국가를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왕후이의 분석은 그가 이전부터 수용하던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수용한 폴라니적 국가관(이중적 국가: 시장화를 사회에 강제하는 것도 국가이지만, 한편으로 복지정책 등 사회의 보호운동의 주체도 국가라는 역설)의 입장에서 왕후이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는 국가는 비판하고, 복지정책 등을 입안해서 실시하는 국가는 긍정하는 것은 이론적 입장에서 오히려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저자도 인용하고 있듯이 첸리췬(錢理群)의 평가처럼 왕후이의 ‘정당-국가화’ 테제가 현재의 중국 공산당과 국가기구가 일체화된 ‘당-국가 체제’에서 자꾸 중국 공산당을 분리시켜 일당 독재라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은 경청해야 한다. 실제로 왕후이를 비롯한 신좌파들이 기층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구체적 제도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 비판은 그들에게 뼈아픈 일침이다. 다만 그들이 ‘국가’를 중심에 두고 사고한다기 보다는 여전히 ‘사회’와 ‘인민’을 위해 ‘국가’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가 문제의식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를 ‘국가주의’라고만 단정짓고 일반화하기에는 성급해 보인다. 

- 이념 중심의 분류 구도를 넘어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한편, 책에서 중국 지식인들을 유파별(신좌파, 자유주의파, 문화보수주의파, 사회민주주의파, 구좌파, 대중민족주의파, 신민주주의론파)로 분류하고 그 성향을 표로 정리한 지식인 지도(70~73p)를 살펴보면, 약간의 오류들이 발견된다. 

우선 구좌파, 즉 마오주의파로 분류된 지식인들의 명단에 경제학자 랑셴핑(郞咸平)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오류라고 보인다. 랑셴핑이 2000년대들어 사기업들이 국유기업들을 인수, 합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국유자산 유실 문제를 제기하고, 서민들의 입장에서 경제문제를 해설하고 최근 중국 경제 경착륙 문제를 제기하는 등의 활발한 대중 활동을 벌이자 구좌파들이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시한 것은 맞지만, 정작 랑셴핑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마오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주류경제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굳이 한국의 경제학자에 비유하라면 최근의 활동이나 분석 방법, 서민들을 우선시하되 경제나 부동산의 경착륙을 제기한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김광수나 선대인에 비유할 수 있는 지식인을 마오주의파로 분류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그리고 정치학자인 판웨이(潘維)를 신좌파로 분류한 것도 잘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판웨이가 중국모델론을 제기하고 서구의 의회민주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왕샤오광 등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신좌파들의 국가론이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대중참여와 직접민주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데 비해 판웨이의 ‘자문형 법치 국가론’은 그 중심이 ‘민주’보다는 법치와 안정적 관리에 있으며 중국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신좌파가 아니라 신보수주의(책의 분류에 따르면 문화보수주의)로 분류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바람직한 비판적 지식인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첸리췬 역시 간단하게 자유주의로 분류하기에는 그 사상적 자원이 매우 복잡하다. 첸리췬 자신은 스스로 어느 유파에도 분류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굳이 자신을 분류하자면 아나키스트에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한 적도 있고 마오주의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자신을 신좌파들은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고 자유주의자들은 신좌파로 부른다며 그래서 별명이 ‘배트맨’이라고 불린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가 역사 속에서 발굴해내는 사상적 자원들이 국가 사회주의 안에서 권위주의적 체제를 좌파적으로 비판하는 민간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굳이 첸리췬을 분류하자면 이런 지식인을 호칭하는 ‘이단적 사회주의자’라고 평하던가 아니면 본인의 표현대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나 저자도 인용하는 표현인 ‘루쉰좌파’라고도 분류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그를 서구의 민주제도를 그대로 중국에 도입할 것을 바라는 류샤오보(劉曉波)나 하이에크와 미제스를 그대로 수용하는 신자유주의자인 류쥔닝(劉軍寧)과 같은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색하다. 류샤오보는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다가 막대기를 너무 구부린 나머지 미국이라는 정의로운 국가가 무력을 개입해서라도 중국을 바꿔놓기를 바라는 입장이며, 그래서 이라크 전쟁도 응원하고 지지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첸리췬은 최근 왕후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개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샤오보나 류쥔닝보다는 왕후이와 사상적으로 훨씬 가까워보인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중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인 원톄쥔(溫鐵軍)이나 쑨꺼(孫歌), 리쩌허우(李澤厚) 등은 어느 유파에도 배속될 수 없으므로 분류에서 빼놓았다고 했는데,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지식인들을 좌/우, 보편/특수, 국가/시장, 전통/국제, 독립/관방 등의 이분법적인 이념적 성향으로 분류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대립구도를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이들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분류방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저자가 책 곳곳에서 지식인들의 분화과정과 쟁점들을 자세히 언급하고 서술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분류방식을 책의 단점으로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념적 분류와는 별개로 여러 쟁점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이 지식인들이 각각의 사회세력들, 특히 기층 인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분류가 보완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중국연구’와 ‘중국비판’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모색하자

저자는 한국의 중국학계 및 대중들에게 중국 숭상(숭중)과 중국 혐오(혐중)를 넘어 중국 연구와 중국 비판을 제언하고 있다. 하지만 서평자의 판단으로는 학계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의 시선으로 넘어가면 한국에 ‘숭중’의 시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 지배적인 중국 담론은 여전히 냉전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한국 경제에 위협이 된다는 ‘중국위협론’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우리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줄 것이라는 ‘중국기회론’이다. 물론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와 글로벌 헤게모니의 교체기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중국의 부상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론’들이 새롭게 등장하고는 있지만 이 담론이 적극적으로 중국을 긍정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조금 더 지구적인 차원에서 얘기해보자면 사회과학계에서 중국모델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아시아론들은 중국 내부에서 먼저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일부 서구 좌파들에게서 시작된 것이 중국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8혁명의 시기 학문적 성숙기를 거친 학자들에게는 여전히 마오의 혁명론과 제3세계론의 흔적들이 느껴지고, 이것이 한계에 달한 신자유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와 겹치면서 기존과는 다른 질서에 대한 기대들이 중국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마오 시기 중국이 가졌던 해방적 전망을 넘어서서 과거 중국의 경제와 정치시스템(예를 들어 조공시스템) 속에서도 서구의 근대적 질서와는 다른 점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유럽은 내부에선 대등한 국제관계를 형성했으나 비서구 사회는 식민지배하며 철저하게 약탈하고 착취했던 위선적인 체제이다. 반면 중원 중심의 조공시스템은 중국 헤게모니 아래에서 철저한 위계에 입각해 있지만 내치에서는 내재적 자율성이 존중되는 독립적 정치체였고, 경제 문제에서도 착취관계가 아닌 재분배적(혹은 상호적) 교환시스템으로 인식되며 그에 따라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가능했던 시스템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중국의 학자들이 국내 정치경제 모델의 재구성을 넘어 국제정치적인 모색을 시도하면서 위와 같은 전통의 재해석들이 좀 더 힘을 받고 있는 그런 양상으로 보인다. ‘화평굴기론’이라던가 ‘책임있는 강대국론’ 등의 공식담론도 포함해서 중국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부상은 주변국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이득이 되는 그런 관계라고 역설한다. 

이런 학문적 시도들이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관심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 제국주의와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각이 너무 중국에 대한 희망적 예단(wishful thinking)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도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다름아니라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확언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판단이 더 힘든 것이 중국 내부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길을 놓고 탐색 중이고 말 그대로 “돌다리를 두드려가며 강을 건너는(摸著石頭過河)” 중이며 우리가 잘 모르는 현장에서 또 새로운 실험과 정책적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중국론인가”에 대해서 확답을 내리기보다 중국에서 새로운 대안적 근대를 모색 중인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의 시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로서는 섣불리 중국이 가는 길을 단면에서 바라보고 비난하거나 찬양하기 보다는 대안적 실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응원하고, 패권과 권력의 길을 넘보는 것에는 단호히 비판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학계의 논의를 넘어 기층으로부터의 연대를 통해 우리와 중국이 서로의 참조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들을 더 많이 발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리영희라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프리즘을 통해 중국의 ‘하방’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80년대 한국의 노학연대나 현장진출로 이어졌고, 또 이제는 [전태일 평전]을 비롯해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를 담은 책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 노동운동가들과 현장 노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의 대표적인 농민공 활동가인 쑨헝(孫恒)의 애창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한다. 21세기 생산과 금융이 지구화된 시대에 비판적 중국연구란 객관적인 관점에서의 중국연구와 비판을 넘어 서로의 연대의 자원들을 적극 발견하고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중국 신좌파의 불안한 모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추이즈위안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  현대중국의 중국의 사상과 이론 2
추이즈위안 지음, 김진공 옮김 / 돌베개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처 :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제8호 2014년4월호

중국 신좌파의 불안한 모험?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추이즈위안 돌베개 / 20142월 / 12,000

얼마 전 영국의 좌파저널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인터뷰를 모은 책 좌파로 살다(사계절)가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60여년 동안 발행되는 이 저명한 잡지의 수많은 인터뷰 중 <뉴레프트리뷰편집부가 누구의 인터뷰를 선별해 실었고어떻게 배치했는지였다. 16개의 인터뷰 중 제4부에서는 21세기 비서구 좌파의 사유를 다루었는데 주앙 페드루 스테딜레(브라질 MST)와 아사다 아키라(일본),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인 신좌파인 왕후이(汪暉)의 인터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인터뷰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유작으로 남기고 2009년 세상을 떠난 조반니 아리기였다이러한 선별과 배치는 20세기와 21세기 초입을 거치면서 전지구적으로 분포된 좌파의 확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서구 신좌파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추이즈위안(崔之元, 1963년생)은 왕후이(1959년생)와 동년배로서 이 둘은 중국 신좌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왕후이가 루쉰 연구가로서 인문학적 신좌파를 대표한다면추이즈위안은 정치(경제학)학자로서 제도적 신좌파를 대표한다고나 할까그래서인지 그는 신좌파 중에서도 가장 실천적으로 충칭모델의 성립에 가담했다. (지난 미래에서 온 편지』 2호에 소개했던 책 중국을 인터뷰하다(창비)에는 추이즈위안의 인터뷰와 중국 신좌파들의 최근 경향에 이론적 영감을 준 자유주의자 야오양그리고 이들을 비판하는 첸리췬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추이즈위안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은 바로 그 충칭모델의 이론적 자원에 대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실험은 계속된다
2012년 충칭 당서기 보시라이는 대륙 권력의 핵심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기 직전 역풍을 맞고 추락했다이로서 중국 신좌파의 충칭실험이 끝난 게 아닌가광둥모델의 대항마는 사라진 게 아닌가라는 세간의 평이 존재했다그러나 추이즈위안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보시라이와 더불어 충칭모델의 또다른 핵심 주체였던 충칭시 시장이었던 황치판이 중국공산당 18기 3중전회에서 개혁방안의 초안을 작성할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는 과연 무엇일까추이즈위안에 따르면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경제적 목표는 개혁과 기존 금융시장 체제의 전환을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며정치적 목표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추이즈위안을 비롯한 중국의 신좌파들은 (금융자본 위주의 경제질서에 매우 부정적이며 이러한 질서를 확립한 서구 보편주의에 부정적이다이러한 관점에 따를 경우 제3세계의 다양성과 역량을 사상시킨다.그렇다고 대척점에 서 있는 문화상대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신좌파들은 양자를 초월하기 위한 관건은 제도의 창조적 혁신이라고 보고 있다추이즈위안이 보기에는 이러한 혁신의 총합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또는 자유사회주의이다.
그는 국가소유도 아니고 개인소유도 아닌 중국 농촌의 토지 집단소유가 푸루동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이는 자본주의 대농장이 소농을 모두 잡아먹기를 기다리던’ 카우츠키와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다른중국적 실천이었다는 것이다추이즈위안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이론가 중 하나는 제임스 미드이다미드의 노자합자기업과 사회적 배당’(기본소득과 연결되는 개념)을 근거로 추이즈위안은 중국의 주식합자제도가 사회적 배당으로 나아가는 실험을 기대한다.
이러한 추이즈위안의 제도적 설계의 이면에는 사상적 전제가 있다바로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시장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를 대표하는 이론가는 프랑스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페르낭 브로델이다이 지점에서 브로델-월러스틴-아리기의 사상적 계보가 중국의 신좌파들로 연결되고 있다.

신좌파공산당의 이데올로그인가?
최근 한국 지식계에서도 오랜만에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논쟁의 중심에는 연세대 조경란 HK 연구교수가 낸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글항아리)가 있다조경란 교수는 이 책을 통해 2000년대 후반정확히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중국 경제의 성공(이른바 중국 굴기(崛起)’) 이후 왕후이를 비롯한 중국 신좌파들은 더 이상 비판적 지식인도 아니고 국제주의자도 아니라고 비판한다중국 신좌파들은 자본에는 비판적일지언정 국가에는 침묵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는 것이다왕후이는2000, “세계 체계의 힘에 주목하고 그 힘에 대항하는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최근에 와서는 시진핑이 얘기하는 중국몽(中國夢)을 두둔하면서 세계질서 속에서의 중국의 위상 재고,미국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중국모델론소프트파워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조경란 교수의 이러한 신좌파 비판에 대해 신좌파에 대해서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일당체제가 체제의 출발점인 사회에 대해 서구적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등의 반비판이 존재한다.
하지만왕후이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루쉰 연구가이자신좌파에 대해 관대했던 첸리췬의 중국 신좌파에 대한 비판적인 물음을 들어보면 중국 신좌파의 위상과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정말로 자기조정의 기제를 가지고 있는가중국의 농민은 진정 사회적 주체성을 지니는가?중국의 당과 정부는 진정 중성적(中性的)이어서 이익집단과 분리되어 있는가?”
예컨대 신좌파들은 야오양의 중성정부(中性政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중국 정부(혹은 중국 공산당)특정한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계급이익을 대변한다고 보는데이거야말로 국가에 포섭된 지식인의 대표적인 모습 아닌가?
중국 신좌파들이 국가주의화 되면서 이들의 관심은 중국모델론으로 집중되고 있다이러한 중국모델론은 서구 신좌파들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바로 미국을 넘어서기 위한 현실 가능한 경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 말이다중국모델론은 미국 중심 체제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지만또다른 한편으로는 모델로의 정합성과 현실성을 기준으로 지적 자원이 배치되면서 상상력을 제한하고 협소해질 수 있다또한 중국 공산당 체제를 옹호해주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주목해서 봐야 한다설사 그러한 대안적 중국모델이 성립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서구 중심주의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렇기에 오히려자유주의 좌파로 분류되는 첸리췬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재구성이 신좌파보다 더욱 좌파스럽게더욱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물론 복잡한 대륙의 사상적 지형을 온전히 따라잡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곳으로보다 넓은 시야로 옮겨가야 하지만 말이다.

<더 읽을만한 책>
중국에서 좌파로 산다는 것」 좌파로 살다뉴레프트리뷰 엮음 사계절 / 20142월 / 35,000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조경란 글항아리 / 201310월 / 18,000
중국을 인터뷰하다이창휘·박민희 엮음 창비 / 20138월 /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