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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시와 광시곡- 농민학에서 본 중국의 역사와 현실사회 비판 |
친후이·쑤원 지음 / 유용태 옮김
2000년 4월 11일 발행 / 463쪽 / 값 25,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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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 2000년 우수학술도서
문화대혁명 때 농촌에 하방되어 9년간 농민이었던 지은이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혁명의 사회역사적 원인과 오늘날 중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실증적으로 치밀하게 파헤친 자기성찰적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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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역자 소개 |
친후이·쑤원(秦暉·蘇文)
친후이는 1953년 중국 광시(廣西) 성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아버지가 지식분자라는 이유로 농촌에 하방되어 9년간 농사를 지었다. 란저우(蘭州) 대학의 대학원에서 중국경제사와 사회사를 전공한 후 산시사범대학(陝西師範大學)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밭가는 자의 말: 농민학 문집>, <문제와 주의: 친후이 문선> 등이 있다.
쑤원은 195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태어났다. 란저우 대학 외국어학과(러시아어 전공)와 대학원 역사학과(소련·동유럽사 전공)를 졸업한 후 산시사범대학 역사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친후이의 부인이며,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편역국(中央編譯局) 세계사회주의연구소 러시아연구센터 연구원이다. 저서로 <농촌코뮌, 개혁과 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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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유용태
1957년 서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동양사학과(석사)와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박사)에서 중국현대사를 전공하였다. 중국 난징 대학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대중국의 농민운동과 직업대표제의 모색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편역서 <농민운동 조직론>과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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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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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농민학
서론: 농민, 농민학과 농민사회의 현대화
1장 여산의 진면목: 봉건사회란 무엇인가
1. 농민과 봉건사회
2.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문제
3. 마오쩌둥과 량수밍의 논쟁이 남긴 문제들
4. 마르크스의 봉건사회관에서 농민적 봉건사회관으로
2장 관중 농민사회 분석
1. 봉건사회의 관중 모델
2. 지주계급이 없는 관중 농촌
3. 소작이 없는 관중 농촌
4. 관중의 봉건관계
3장 관중 모델의 사회역사적 기원과 종법농민 연구에서의 이성의 재건
1. 1920~1940년대의 관중 모델
2. 청대의 관중 모델
3. 분산된 토지소유와 토지유통
4. 자연경제 속의 경영지주와 과밀화 문제
5. 관중 모델의 몇 가지 배경
6. 관중 모델의 경험적 의의와 논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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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속박과 보호의 협주곡: 봉건관계의 세 요소
1. 자연경제와 명령경제
2. 종법공동체 속의 공과 사
3. 인신예속관계: 강제된 부자유와 자발적 부자유
4. 속박과 보호의 광대한 그물망
5장 빈곤 속의 평균: 종법시대의 사회계층
1. 등급분화와 계급분화
2. 종법소농의 분화와 차야노프 순환
3. 종법적 사회의 분화유형과 그 정량분석
6장 자유봉건주의론에 대한 질의: 중국 봉건사회의 특질문제
1. 아시아적 생산양식, 상업자본주의, 자유봉건주의
2. 가족-국가 일체의 종법공동체와 사유재산
3. 가짜 상품경제와 소작제
4. 봉건공동체의 세 형태
5. 겸병억제: 단지 하나의 기만인가
7장 농민의 세번과 농민의 방데: 봉건사회에서의 농민의 위치
1. 농민의 이중성에 대한 질의
2. 필사적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사유자: 농민의 혁명성
3. 보호를 갈구하는 공동체 성원: 농민의 보수성
4. 종법농민의 계층: 등급분석
5. 농민과 민주혁명: 동력인 동시에 대상
8장 다루기 힘든 계급과 그 심리: 종법농민 문화의 사회통합
1. 동양형 질투와 기타: 종족문화관과 사회문화관
2. 아Q의 나쁜 근성: 종법공동체 문화통합 속의 농민문화
3. 도시 속의 촌락: 도시인의 농민의식
4. 농민문화와 문화를 가진 농민: 중국 지식인의 전통심리
9장 구체적 농민과 추상적 농민의 이중적 가치체계
1. 종법농민사회 가치취향의 이중성
2. 반농민적 농민 영수 문제에 대하여
3. 농민 민주주의와 근대 민주제도의 상이한 가치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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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인성의 위축과 인정의 팽창: 농민문화의 윤리관 분석
1. 인성과 인정
2. 빈농의 '성 자유'와 예교의 성 속박
3. 인정 동심원과 농민사회의 정보 전파 유형
4. 가족 응집력의 수수께끼
5. 인정 동심원의 해소와 혈연조직의 현대화
11장 비이성: 농민의 사유방식 분석
1. 중국문화는 일종의 이성문화인가
2. 이성적 소농과 농민의 비이성
3. 종법농민에게서 나타나는 비이성의 각종 유형
12장 농민의 과거, 현재, 미래
1. 고전소농과 고전문명
2. 메이 플라워 정신과 미국식 현대화의 길
3. 광의의 민주혁명과 농민국가의 사회주의적 개조
4. 엄중한 교훈
5.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농민개조 문제와 사회주의 민주혁명의 두 가지 전망
결론: 전원시에서 광시곡으로
● 한국어판 서문 |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거기서 '주의'가 생겼다.
5·4운동 이래 중국 지식인은 '주의'와 '문제'의 두 방면에서 열심히 길을 찾고 있다. 5·4운동은 본래, 크기는 하지만 합당하지 않고 그 함의도 불분명한 개념인 '문화'운동이라기보다는 중국인(지식인을 대표로 하는)이 솔직하게 주의를 말하고 문제와 직접 맞부딪치는 운동이라고 해야 옳다. 당시 후스(胡適)와 리다자오(李大釗)가 '문제인가 주의인가'라는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사람을 비롯한 5·4엘리트들은 대부분 주의를 말하고 동시에 문제도 말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주의가 달라서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답이 달랐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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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80년이 지나 세기가 바뀌고 새 천년이 열리는 오늘의 중국은 여전히 대변혁의 시대에 놓여 있으니, 솔직하게 주의를 말하고 문제와 직접 맞부딪치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분명 문제를 회피하는 주의의 설교는 공소할 뿐이고, 주의가 결여된 문제의 연구는 사실나열의 학문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학문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공소화와 사실나열에서 벗어나려는 '문제와 주의'의 토론은 분명히 중국 사상계의 희망이다.
나는 15세에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하방(下放)되어 9년 동안 농민이 되었는데, 그 '올벼 논 대학'(早稻田大學, 한국 독자들은 이것을 일본의 와세다 대학으로 오해하지 말기를)에서 농민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24세에 그 '올벼 논'에서 나와 벼를 심지 않는 대학에 들어가 대학원생이 되어 토지제도와 농민전쟁사를 연구방향으로 잡은 이래 농민문제는 줄곧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론과 실천 모두를 탐색한 결과 나는, 중국의 농민문제는 과거나 지금이나 농민(peasants)의 문제이지 농장주(farmers)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농사짓는 사람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올벼 논'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1949년 이후, 중국에 그나마 존재했던 약간의 시민(citizen) 의식조차 점차 소멸되고 도시인은 시골사람보다 더 농민화(pea-santization) 또는 비시민화(non-citizenization) 되었다. 1978년 이후에도 여전히 시골사람이 도시인에게 어떻게 하면 시민이 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적어도 경제상으로는 그렇다. 9년간의 농사경험은 향촌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해주었고, 수많은 농민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농사짓는 사람의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농민문제 연구, 곧 과거의 농민전쟁사와 토지제도사에서 오늘날의 농업경제학과 농촌사회학은 물론 현재 개혁이 진행 중인 3농(농업·농촌·농민)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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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민학에는 이들 좁은 의미의 농민학 연구 외에 보다 넓은 의미의 내용, 곧 농민국가·농업문명·전통사회의 연구, 특히 이것들의 개혁과 현대화―어떻게 시민국가·공업문명·현대사회로 전환할 것인지―에 관한 연구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것이 결코 단지 농사짓는 사람의 문제나 이른바 3농문제만은 아니다. 9년간의 농촌생활은 나에게 농사짓는 사람의 정서를 갖게 해주긴 했지만, 이것이 마오쩌둥의 말대로 "도시인이 농민으로부터 재교육을 받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으며, 또한 "엄중한 문제는 농민을 교육하는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게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도시인이나 농민 모두에게 똑같이 부자유스러우며, 또한 공동체의 부속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을 뿐이다. 양자간에 차이가 있다면 도시인이 시골사람보다 공동체의 보호(대약진운동 때도 굶어죽은 사람은 시골사람뿐이었으며, 우리 같은 도시인은 시골에 하방된 것을 비록 불행으로 여겼지만 여전히 '지식청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시골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를 더 많이 받는다는 점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속박(자기 몸뚱이조차 제마음대로 할 수 없는 차두이[揷隊]를 포함하여 정치적 통제에서 직장단위의 간섭에 이르기까지)도 더 많이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동체로부터 벗어나는 개혁시대가 도래하자 역시 시골사람이 훨씬 쉽게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보호를 상실한 대가도 더 적게 지불했다. 그러나 결국 개혁은 중국의 도시와 농촌 사회 모두에 대한 일종의 구조재편이며, 도시사람이나 농촌사람이나 개혁 중에 농민(peasants)에서 시민(citizen)으로, 곧 의존적인 공동체 성원에서 개성을 지닌 자유인으로 완성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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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날 중국에서 좁은 의미의 농민학과 넓은 의미의 농민학을 결합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일 농민(peasants)이 사라지고 농장주(farmers)만 있는 발달된 국가에서 사람들이 농장의 최적 규모를 핵심범주로 하여 미시농업경제학을 세우고, 농산물가격-공급반응을 핵심범주로 하여 거시농업경제학을 세웠다면, 중국에서는 농업만을 다루는 농업경제학은 매우 작은 의의밖에 갖지 못할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전제국가와 민간사회간의 모순은 줄곧 농촌 내부의 지주-전호간, 부자-빈자간 모순보다 훨씬 중요했으며(그토록 많았던 농민전쟁은 모두 관청과 조정에 반대한 것이지 지주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농민에게 문제가 있으나 그것은 농민문제가 아니다"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전에 "중국문제의 본질은 농민문제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마땅히 "농민문제의 본질은 중국문제이다"로 바꿔야 한다.
따라서 오늘의 농민연구는 좁은 의미의 농민학과 넓은 의미의 농민학을 결합한 것이어야 한다. 좁은 의미의 농민학은 농사짓는 사람, 곧 농사를 직업으로 하는 주민과 서로 연관된 인문사회문제―토지제도, 농민운동, 향촌사회, 마을조직, 농민부담문제, 향토문화, 농민이동 등―에 관심을 두어야 하고, 넓은 의미의 농민학은 전통사회, 전(前)산업사회, 전근대사회, 전시민사회 또는 저발전사회(전에는 보통 '봉건사회'라 불렀으나 이 용어의 의미는 매우 복잡하다)의 이론, 특히 근대화 발전에 관한 이론을 연구한다. 이런 사회는 보통 농업을 위주로 하지만 그 기본 특징은 직업의 성격에 있지 않고, 그 문제 역시 농사짓는 사람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는 좁은 의미의 농민학은 일종의 '문제'의 학(學)이며, 넓은 의미의 농민학은 일종의 '주의'의 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자를 결여한 농민연구는 공소해지기 쉽고, 후자를 결여한 농민연구는 사실나열식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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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문제와 주의가 결합되고 좁은 의미의 농민학과 넓은 의미의 농민학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전반부는 '관중(關中) 모델'에 관한 연구로서 문제를 실증하는 데 치중했고, 후반부는 전근대사회에 관한 연구로서 이론 또는 주의에 집중했다. 이 책의 원고는 1988년에 쓴 것이다. 당시 나는 관중의 산시사범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던 관계로 이 책의 문제는 관중 모델에서 나왔고, 주의는 1980년대 신계몽운동의 특징을 띠고 있다. 그런데 1989년 중국 정치문화의 기류가 급변하자 출판사가 인쇄된 원고본을 폐기해 버렸다. 그 후 1996년 내가 베이징 칭화(淸華) 대학으로 옮겨 가면서 이 책은 내가 주편한 '농민학총서'의 하나로 베이징에서 출간되었다.
지금 보아도, 이 책을 쓰던 1980년대 후반의 문제와 주의에 대한 나의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최근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을 발전시켰다. 전통사회의 공동체 본위라는 기본 특징을 강조하는 동시에 중국 전통의 대공동체 본위와 서양 전통의 소공동체 본위간의 차이를 지적했다. 서양은 근대화가 시작될 때 '시민과 국왕의 연맹', 곧 개체인권과 대공동체의 제휴를 통해 먼저 소공동체의 질곡을 타파하는 단계를 거쳤다면 중국은 이 단계에서 개체인권과 소공동체의 연맹으로 대공동체의 속박을 타파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으로 근대중국 농촌의 수많은 현상, 가령 청말 종족자치(宗族自治)에서 당대 향진기업(鄕鎭企業)에 이르는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단순히 '봉건의 범람'으로 폄하하거나 '전통의 활력'으로 추켜세우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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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보수적 문화결정론'이 '비판적 문화결정론'을 대체하고 유행할 때, 나는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면서 '문화결정론의 빈곤'을 지적하고 가치상의 보편주의와 진보주의를 주장했다. 아울러 역사상의 비결정론을 주장하여(역사결정론과 문화결정론 둘 다 반대)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책임지는 역사관"을 제기했다.
나는 일찍이 전통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성화된 시민사회를 수립하는 개혁과정을 구식 대가정의 '분가'에 비유한 적이 있다. 분가 전에는 분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분가한 뒤에는 새로운 자유 소가정이 직면할 무관심·고립·위험 등이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양자 사이에서 어떻게 분가할 것인가, 어떻게 공정하게 분가할 것인가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나의 경험에 비춰 보건대, 구식 대가정이 위기에 처할 때 가장 격화되기 쉬운 모순은 분가 여부를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 분가방법을 둘러싼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가과정이 분란을 야기할 것인지 아닌지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분가한 후에 도대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공정하게 분가한 후에 여전히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계산을 분명하게 하는 바람직한 형국, 이성적 교류 속에 화목이 유지되는 가족애를 세우게 될 것인가? 아니면 분가가 불공정하여 원한을 낳고 얼마 후 끝없는 분쟁을 일으켜 문제를 훨씬 더 심각하게 만들게 될 것인가? 심지어 그것은 이미 끝나 버린 '분가 여부를 둘러싼 싸움'을 새삼스레 다시 문제삼는 사태와도 관련되거니와, 이때 불공평한 분가로 인해 격분한 사람들은 도리어 새로운 대가장(大家長)을 찾아 혼란 속에 구식 대가정을 재건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을 또다시 반복시키는 역사의 악순환을 조성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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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떻게 분가할 것인가와 분가의 공정성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며, 이것은 분가과정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인류가 육도윤회(六道輪回)의 괴상한 권역에서 탈출하여 새 천년의 미래에 신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가 없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진정으로 구식 가장제(家長制)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는 사람들과 신식 현대병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지금까지도 어떻게 분가할 것인가라는 이 중요한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 어떻게 분가할 것인가는 매우 기술적인 문제처럼 보여 분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만큼 형이상학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 문제를 말하는 것조차 기피하기 때문이다. 가산을 훔치거나 강점한 사람은 당연히 공정한 분가를 거론하는 것을 몹시 꺼려 하는데다가 더구나 그들은 집안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이니 그들의 노여움을 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외부인은 분가 뒤의 새 호주들을 상대로 장사할 생각만 할 뿐 분가의 공정성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밖의 다른 외부인은 신식 소가정 속에서 오래 살아서 소가정의 무관심과 외로움에 대해 스스로 줄곧 원망하고, 또한 남한테서 같은 원망의 소리를 자주 듣지만 분가가 불공평해서 생기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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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중국인은 두 가지 일을 하기에도 바쁘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분가의 좋은 점만 논증하고,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분가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산을 훔치고 강점하는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식 자유 소가정의 무관심과 외로움을 강도 높게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구식 대가장을 위한 진혼가를 짓고 있다. 그런데 더러 가산을 강점한 자가 구식 대가장과 동일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위의 두 가지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도처에서 물줄기가 나와 합류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상의 논의가 전혀 일리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가의 좋은 점과 소가정의 무관심이나 외로움은 모두 사실이겠지만, 어떻게 분가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를 떠나서는 그러한 논의의 가치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연유로 공정한 분가, 곧 공정한 개혁의 길을 위해 호소하는 일은 나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1989년 이전 내가 이 책을 쓸 당시(그때는 분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이 진정한 중심 문제였다) 우리는 역사상의 아테네식 길과 마케도니아식 길, 미국식 길과 프로이센식 길에 대한 연구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개혁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야말로 개혁 여부에 관한 논쟁보다 더 중요하다는 명제를 제기했다. 1992년 우리는 공정한 개혁을 호소하면서 "주방장이 다궈판(大鍋飯)을 사사로이 나누어 갖는 것"을 막아야 하며, "주방장이 다궈판을 사사로이 점유"하도록 놔둬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1994년부터 나는 「공정지상」(公正至上)이란 글을 연속 5회에 걸쳐 발표했고, 동시에 역사상의 사례 분석과 현실문제 분석의 두 측면에서 현대화와 개혁의 공정성문제가 각 영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는데, 농촌·농민문제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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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말, 중국에서 '자유주의와 신좌파'간의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이런 논쟁이 그보다 앞서 벌어졌으며, 국내에서는 이미 '문제'의 논쟁형식으로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이 두 논쟁에 모두 참여했다. 나는 1980년대의 '문화 붐'에서 1990년대의 '주의 붐'(主義熱)에 이르는 과정을 사상해방이 한 단계 진전된 것으로 생각한다. '문화 붐'이 일었을 때는 아직 '문제'와 직접 대면하고 솔직하게 '주의'를 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단지 문화토론의 형식을 빌어 은유적인 사상논쟁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어디에나 다 공자(孔子) 또는 문화전통을 끌어넣으려 했는데, 오히려 본래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를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야 '주의'를 토론할 공간이 생겼는데, 이는 실로 커다란 진보이다.
그러나 '문제'를 토론할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문제'에 대한 금기가 종종 '주의'에 대한 금기보다 더 엄격해서(이것은 어떻게 분가할 것인가가 분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보다 더 돌출되고, 이익충돌이 신앙충돌보다 더 두드러진 사회동태가 사상계에 투영된 결과이다) 이번의 '주의'토론을 지금처럼 많은 부분 '사상자원'(思想資源) 면에서만 전개되도록 만들었다. 그 한쪽은 하이에크와 코즈(R. H. Coase)이고 다른 한 쪽은 포스트(post-)학과 네오마르크스주의여서 듣다 보면 마치 서양인끼리의 논쟁 같다. '자원'의 논쟁은 당연히 의미있는 일이지만 현실을 벗어난 문제의식이나 자원이라면 오히려 '사상'을 가려 버릴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심각한 '주의'도 모두 현실의 문제의식을 벗어날 수 없고 학술 전승의 맥락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뮈르달의 사상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기실 어떤 특정한 '문제' 앞에서 서로 조화되지 않는 사상이 어찌 이 둘뿐이겠는가. 둘 다 극단적 자유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는 하이에크와 미세스(Ludwig E. von Mises)조차도 서로 조화될 수 없다. 하지만 또 다른 어떤 '문제' 앞에서는 하이에크와 뮈르달은 말할 것도 없고 하이에크와 마르크스조차 동일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중국의 현실에서 하이에크의 이념에도 맞지 않고 마르크스의 이념에도 맞지 않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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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러시아 시대에 사회민주파(마르크스주의자)는 미국식 길을 추구했고 자유파는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다. 처음에 사회민주파와 자유파는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이 양자는 함께 결합하여 과두주의·인민주의자를 상대로 첨예하게 맞서 투쟁하였다. 하지만 그 후 스톨리핀 시대에 일부 사회민주파는 날로 인민주의화되고 일부 자유파는 날로 과두주의화됨에 따라 양자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져서 과두주의와 인민주의 풍조가 갈수록 뜨거워졌다. 결국 '불공정한 분가'에 뿌리를 둔 한바탕의 사회동란 속에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함께 사라져 버렸는데, 인민주의와 과두주의는 오히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결합하여 러시아를 길고 긴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늘날 중국의 '주의 붐' 속에서 이런 역사를 되돌아보면 마땅히 기억해 두고 참고할 만한 교훈이 수없이 많다. '주의 붐'에 편승한 각 파들은 모두 당대 서양으로부터 사상자원과 부호자원을 흡수했으나 자유질서가 일찍 수립된 서양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실로 자유질서가 수립되기 전의 제정러시아와 더 유사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유의 결핍은 사회민주가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며 사회민주의 결여 역시 자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사회민주파는 자유경쟁의 민주국가, 곧 미국식 길을 동경하고 비스마르크식 사회보장제도를 갖춘 전제국가, 곧 프로이센식 길을 혐오했다. 자유주의 반대파는 적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오히려 마르크스를 찬양하고 토리당식 보수주의를 반대해야만 했다. 이와 유사하게 중국의 현실에 입각해서 보면 중국인에게는 현재 자유주의가 너무 많거나 사회민주주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과두주의와 인민주의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입장에서 출발해 과두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 입장에서 출발해 인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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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전선(戰線) 위에서 '주의'논쟁에 참가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의 입장은 도대체 자유주의인가 아니면 사회민주주의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자유질서가 수립되기 전에는 이 두 입장의 가치가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점점 많았고, 오직 자유질서가 수립되어야만 비로소 양자의 가치가 중첩되는 부분이 점점 줄어들어 가치대립이 뚜렷해질 것이다라고.(그러나 오늘날 선진국가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시 한 번 새롭게 중첩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중국이 당면한 문제상황 속에서 내가 견지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모두 긍정하는 그런 가치이며,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모두 부정하는 가치를 반대한다. 자유주의는 긍정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부정하는 것들(가령 '순수시장경제'), 그리고 자유주의는 부정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긍정하는 것들(가령 '지나치게 강력한' 노동조합)은 아직 중국에 없다. 그런 것들이 생긴 다음에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른바 '제3의 길'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1의 길과 제2의 길의 중첩(두 길의 사이도 아니고 두 길의 바깥도 아니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중국의 당면한 문제는 자유가 너무 많아서 평등을 저해하는 것도 아니고 평등이 너무 많아서 자유를 저해하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자유와 동시에 더 많은 평등이 있는 제3의 길을 추구할 뿐, 자유도 없고 평등도 없는 그런 제3의 길을 추구한다거나 반쪽 자유와 반쪽 평등 또는 자유와 평등 사이를 절충한 제3의 길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지난날 히틀러는 앵글로 색슨식 민주주의와 소비에트식 민주주의를 초월한 게르만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도 평등도 없는 제3의 길의 한 예인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이것을 배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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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날 영국의 블레어 수상은 그의 제3의 길이 복지국가도 아니고 자유방임도 아니라고 공언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복지와 자유방임이 이미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대다수 인구(농민)가 손톱만큼의 사회보장도 받지 못하고 자유도 극히 조금밖에 누리지 못하는(도처에서 '농민공'을 청소하는 광경을 보라) 중국은 더 많은 복지, 더 많은 자유방임의 길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블레어의 모색이 비록 값진 것이긴 해도 중국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따라서 중국이 가고자 하는 길은 반(反)자유·반(反)사회민주의 길이나 자유·반사회민주의 길 또는 반자유·사회민주의 길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유와 사회민주 사이에 놓여 있는 길도 아니다. 오로지 자유와 사회민주 양자의 가치를 합친 길이다. 이런 기본가치가 이미 실현된 나라에서는 자유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각각의 가치를 위해 좌·우 또는 중간의 입장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위에서 말한 기본가치를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사실상 두 가지 입장, 곧 인도적 입장과 반인도적 입장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외국의 어떤 사람은 "자유주의 좌파는 자유주의 우파를 반대한다"는 명제를 제기했다. 그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참명제일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나라의 자유주의 좌파는 자유주의 우파말고는 반대할 만한 대상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으로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는 자유주의 우파만을 반대하는 사람 또는 자유주의 우파를 제1의 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유주의 좌파가 아니라 (제정러시아 시대 사회민주당원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경찰인민주의자'이다. 반면 자유주의 좌파만을 반대하거나 사회민주 원칙만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무슨 자유주의 우파가 아니라 '경찰과두주의파'이다. 그러나 플레하노프 등이 지적한 대로 경찰인민주의파와 경찰과두주의파는 아주 쉽게 상호 전환했고 이 때문에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도 서로 적대시해서는 안되며 '각자 따로 달려가서 함께 공격하는' 관계여야 했다. 자유파와 사회민주파의 관계가 이와 같은데 "자유주의 좌파는 자유주의 우파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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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의' 문제에서 나는 자유-사회민주를 기본적 가치로 하는 입장, 전에 내가 썼던 표현을 빌린다면 '자유가 주의에 우선하는' 입장을 견지할 뿐이다. 이 입장은 서양에서라면 매우 중용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그것은 대가장이 종법 대가정을 보호하거나 부흥시키는 데(이것은 현재 중국의 일부 좌파들이 찬성하고 있다) 불리하며, 대가장이 가산을 독점하고 자식들을 집 밖으로 쫓아내는 데도(이것은 현재 중국의 일부 우파들이 찬성하고 있다) 불리하다. 정치적으로도 그것은 '옹호만을 허용하는 정부'를 반대하고 '반대할 수 있는 정부'를 지지하길 원한다. 그래서 '자유가 주의에 우선하는' 입장은 옹호만을 허용하는 정부를 무조건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의 공격을 받는 동시에 반대할 수 있는 정부를 무조건 반대하는 급진주의자의 공격도 받는다. 분명히 이런 입장은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이며, 오늘의(20년 전이 아닌) 한국에서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에서 이런 입장의 앞날은 많은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암담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이는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화결정론을 반대한다. 나는 역사가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고(그래서 역사는 해석이 가능하다) 보지만 역사주체로서의 인간이 주관적 능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의 인과는 단지 확률적인 인과이며, 필연적인 인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이 안되는 확률은 아무리 여러 번 곱해 본들 0에 가까워질 뿐이기 때문에 긴 안목으로 보면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 수 있다. 예컨대 만약 사건 A가 사건 B를 일으킬 확률이 80%, 사건 B가 사건 C를 일으킬 확률이 60%, 사건 C가 사건 D를 일으킬 확률이 70%라고 한다면, 사건 A가 사건 D를 일으킬 확률은 겨우 33.6%에 불과하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은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 중국의 앞날이 밝지 못하다면 그것은 공자를 탓할 일도 마르크스를 탓할 일도 아니며, 단지 우리 자신을 탓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력하기만 한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것이 바로 '주의'에 대한 나의 태도이며, 그것은 농민학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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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주신 유용태 선생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한·중 양국은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유교문화권' 따위의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중 양국은 지난날 동아시아 벼농사의 정경세작(精耕細作) 전통을 가진 농민사회이며, 근대에는 둘 다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을 막아 내고 안으로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후발 근대화의 길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러시아식 사회주의'도 시도해 보았고 '아시아식 자본주의'도 시도해 보았다. 중국은 시간상 앞뒤로, 한반도는 남과 북에서 각각 이 두 가지 길을 거쳐 왔다. 중국은 아직까지 북한이 안고 있는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남한이 안고 있는 문제와 대면하기 시작했다. 남북한 인민도 각기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요컨대 한·중 인민은 모두 농민국가의 현대화 과정에서 러시아식 사회주의도 뛰어넘고 아시아식 자본주의도 뛰어넘어 공정·자유·민주·인도·번영·부강의 발전방식을 찾기 위해 힘써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한·중 양국의 학자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해야 한다. 나는 한국의 학자와 독자들이 이 책에 대해 비평하고,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한다.
1999년 12월
베이징에서 친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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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서평 |
중국의 제3의 길 제시 |
문화일보/ 2000년 4월 19일/ 최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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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사회 개조가 中 현대화 핵심 자본주의 수용 '제3의 길'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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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농민인구 23억 가운데 중국의 농민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40%(9억)에 달한다. 그나마 직업으로서의 농민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 신분으로서 '농민'을 정의하면 중국 농민은 세계 농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난 81∼85년 사이 세계 농촌인구의 비중은 7% 이상 감소했으나 같은 기간 중국 농촌인구의 비율은 0.3%밖에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면 세계 농민 대부분이 중국인인 시대가 점쳐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중국의 문제는 농민문제이고 중국문화는 농민문화라는 지적이 새삼스럽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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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번역된 '전원시와 광시곡'은 결국 현대화 문제가 농민사회의 개조, 그것도 단순히 농업인구를 도시인구로 변화시키는 것 외에 농민문화·농민심리·농민인격을 개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중국사회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아울러 중국 사회주의의 본질이 봉건사회에 기반한 봉건사회주의였음을 주장한다. 제목인 '전원시(田園詩)'는 가부장제로 특징되는 종법(宗法)공동체 성원의 목가적 분위기를, '광시곡'은 이같은 봉건관계를 타파하고 독립된 자유인의 활력 넘치는 생활을 상징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저자는 부부인 친후이(秦暉) 베이징(北京)대·칭화(靑華)대 사학과 교수와 쑤원(蘇文) 중국공산당 중앙편역국 세계사회주의연구소 러시아연구센터 연구원. 문화대혁명 시절 15세의 나이로 하방(下放)되어 9년동안 농민생활을 겪었던 친후이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토지제도와 농민전쟁사를 천착해온 농민학 연구자다. 역사학에서 출발한 저자들은 이 책에서 경제학·사회학·문화인류학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아우르는 학제(學際) 연구의 전범인 중국 농민학의 수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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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레닌·스탈린 등이 남긴 사회주의 원전 분석에서 보여주는 독창성이나 중국의 고전과 민요, 토지대장, 현대소설 등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는 능력은 우리 학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1급에서 50급까지 편차가 다양하다는 중국의 연구자들 가운데서도 이들은 특급의 스칼라십을 보유한 학자다. 그동안 중국 봉건사회의 전형으로 이해돼온 소작농 위주의 타이후(太湖) 모델과 상반되는 유형으로 제시한 자작농 위주의 관중(關中)모델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20세기 사회주의가 지주소작제를 봉건제로 간주해 지주타도,곧 공동체 수장의 교체에 그쳤을 뿐 종법공동체 자체를 타파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세계에서 유례없는 농민혁명을 통해 수립된 중국 공산당 정부도 정작 농민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농민을 매우 중시하는 중국에서 학계의 농민연구가 한계에 다다르고 농민을 개조하는 정부의 인민공사화운동도 실패로 끝난 이유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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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80년대 이후 추진한 개혁개방정책으로 그동안 수면아래 잠자고 있던 봉건사회의 잔재가 한꺼번에 떠올라 중국사회를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고 밝힌다. 이들에게 오늘날 중국사회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용어인 '관시(關系)'와 '다궈판(大過飯)'공동체, '철밥통(鐵飯碗)' 등은 중국사회가 공산혁명에도 불구하고 봉건사회의 특징인 종법공동체와 종법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핵심 코드로 읽힌다. 반면 개인주의를 숭배하는 자본주의 농업에서 오히려 생기발랄한 협동화나 집단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성공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역설이다.
결국 저자들은 문제의 본질을 현대 농업조직 형태로서 협동제는 상품생산자의 자유인 연합체이며,이를 건설하려면 먼저 발달된 개성을 갖춘 노동자가 형성돼야 한다는 데서 찾는다. 이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은 종법공동체를 해체했지만 사유제를 극단적으로 추구해 인간소외를 낳았고 옛 소련이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사유제 폐지에만 열중한 나머지 종법공동체를 온존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고 본다. 따라서 현대 중국의 과제로 종법공동체의 해체를 전제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을 취한 '사회주의 자유인 연합체'를 실현하는 것을 제시한다.
마치 중국판 '제3의 길'을 연상시키는 듯한 저자들의 주장은 아직까지 전통의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서울대 강사인 유용태씨의 번역도 매끄럽다.
● 옮긴이의 말 |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여기저기서 금세기의 역사적 대사건들을 꼽아 회고했다. 그 사건들 중에 중국혁명은 늘 끼여 있었다. 이제 중국혁명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났고, 그것과 상반되는 듯한 '또 하나의 혁명' 또는 '제2혁명'으로도 일컬어지는 개혁·개방을 추진한 지도 20년이 되었다. 농민을 주력으로 한 항일전쟁과 신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로 새로운 중국이 수립되고 농민은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생산력 증대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제2혁명에서는 농민이 어떤 주된 역할도 담당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자리잡으면서 역사상의 농민과 농민운동에 대한 해석도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다. 가령 역대 모든 농민반란은 생산력을 파괴하여 중국사의 정체(停滯)를 가져온 주범이라 하거나 당대 중국사회 봉건주의의 근원으로 농민 소생산자의 이데올로기와 심리구조를 지목하는 견해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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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필요에 따라 역사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인데 중국인이 농민을 어떻게 보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현대 중국 50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중국을 포함하여 농민을 주력으로 노농동맹에 의해 진행된 20세기의 여러 혁명과 사회주의의 문제로 직결된다. 그래서 이것은 이 모델을 따른 북한 사회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형식상 이와는 정반대의 모델을 따라 자본주의를 추진하긴 했지만 우리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과거는 물론 지금도 우리는 중국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처럼 농민과 농업을 기초로 한 국가에서 제기되는 농민문제라면 그것은 더 이상 농민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만약 중국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를 '중국학'이라고 한다면, 중국학의 핵심은 사실상 '농민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정체와 봉건주의의 책임을 농민반란이나 농민 소생산자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농업사회와 이에 기초한 사회정치체제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전원시와 광시곡>은 이런 문제의식에 충실한 중국인 자신의 연구서인 秦暉·蘇文, <田園詩與狂想曲―關中模式與前近代社會的再認識>(北京: 中央編譯出版社, 1996)을 완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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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5세의 중학생이 문화대혁명 때 농촌에 하방되어 9년간 농민이 되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문화혁명과 중국혁명의 사회역사적 원인을 중국사회 내면으로부터 찾아보려는 치열한 자기성찰적 연구라 할 수 있다. 나는 난징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하던 1997년 가을 어느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해 읽었는데, 처음에는 부제에 보이듯 '전근대 사회'(사실상 농민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점차 이 책이 중국 현실사회의 운행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위한 연구임을 깨달았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문제의식을 이처럼 냉정하게 이론적 실증적 연구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청춘을 앗아간 권력자들에게 분석의 칼을 겨누기는커녕 손톱만큼의 반감도 드러내지 않는 냉정함 속에, 중국의 농민학 이론체계를 세우려는 지은이의 학문적 열정이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문화혁명을 정책결정자의 좌경 탓으로 돌리지 않고 전근대사회의 운행 메커니즘이 극복되지 않은 결과로 이해한다. 그의 이런 견해는 고도의 이론적 추상분석과 역사적 실증분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의 이론 도구는 사회주의 원전에서부터 차야노프 등 인민주의 문헌은 물론 마르크 블로크의 아날역사학, 레비 브륄의 문화인류학, 테오도르 샤닌 등의 농민학을 비롯한 20세기 서양 사회과학이론을 아우르며, 그의 역사자료는 경전, 각 시기의 토지대장, 지방지, 비문, 구전 민요, 민간속어, 소설, 토지혁명 당안 등 외국인이 충분히 구사하기 어려운 것들을 두루 포괄한다. 분석시야도 매우 넓어서 시간적으로 고대부터 근현대를 거쳐 당대의 개혁·개방 시기를 아우르고, 공간적으로 중국의 농민문제에 중심을 두되 각 시기의 서양사회(러시아와 구소련, 동·서 유럽, 미국 등)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넘나든다. '농민학'(peasantology)이란 공학적 관점에서 농민을 연구하는 농학과 달리 인문학적 관점에서 농민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책은 흔히 전문분야 별로 진행된 기존의 혁명사나 경제사·문화사 연구와 달리 각종 인접 학문을 가능한 한 폭넓게 종합한 농민사회의 전체사를 추구한다. 분석에 동원된 이론과 자료가 광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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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먼저 '농민'의 어원과 그 의미를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농민의 생존배경으로 거론되는 봉건사회의 개념과 사회관계를 재검토한다. 그리하여 봉건사회의 본질은 토지소유관계나 군사적 충성관계가 아니라 인신의존관계이며 이것을 체현한 사회형태가 '종법공동체'(여기서 '종법'은 '가부장적'을 뜻한다)라고 주장한다. 또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속박-보호 유대가 봉건사회 인신예속의 근원임을 밝힌 다음, 중국 봉건사회를 실증분석하여 자작농 위주의 '관중 모델'과 소작농 위주의 '타이후 모델'로 나누고 어느 모델이든 종법공동체의 인신의존 관계를 본질로 했음을 실증한다. 이를 바탕으로 종법사회의 구조와 유형, 경제운용, 가치관념, 윤리원칙, 사유방식 등이 서로 어떻게 유기적인 체계를 형성하고 전원시처럼 화목하고 엄숙한 선율 속에 운행되었는지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전근대사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을 전제로 했을 때 20세기 사회주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우선 러시아혁명이든 중국혁명이든 모두 지주소작제를 봉건제로 보고 지주 타도, 곧 공동체 수장의 교체에 그쳤을 뿐 종법공동체 자체를 타파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대중은 공동체 수장들의 사욕 추구로 인해 약화된 공동체 성원에 대한 보호기능을 회복·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혁명에 참가했고, 상품경제가 미숙한 조건에서 혁명 지도부도 종법공동체의 엘리트 문화를 체현했기 때문에 그 대중문화를 체현한 농민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에트식 전체주의나 인민공사식 평균주의는 모두 정책결정자의 교조주의 탓이라기보다는 종법공동체의 산물로 이해된다.
결국 지은이가 볼 때 '20세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농민사회주의(인민주의)이며 그 본질은 봉건주의이다. 러시아도 중국도 종법공동체 봉건주의를 타파하는 사회주의 민주혁명의 1단계에 머물렀으므로 당면한 중국의 과제는 이 혁명의 2단계를 완성하는 것, 곧 이런 토양과 문화를 철저하게 혁명하는 것이며 중국의 고난과 희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를 문학적으로 응축한 표현이 '전원시와 광시곡'인데, '전원시'는 종법공동체 성원의 목가적 분위기를 상징하며 '광시곡'은 그 속박-보호 관계를 타파하고 독립된 자유인의 활력 넘치는 생활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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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종법공동체를 타파하고 독립된 자유인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 동력으로 가치법칙에 따라 등가교환되는 상품경제의 발전에 주목한다. 따라서 지은이가 상품경제의 혁명성에만 주목할 경우 시장경제 만능론에 빠질 위험성도 없지 않고 전근대 중국사를 종법공동체와 인신예속의 강화과정으로 서술한 점에서 중국판 '정체성론' 같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지은이를 현재 진행 중인 이른바 '신좌파'와 '자유주의파' 논쟁에서 후자 쪽의 주요 논객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으나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지은이는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종법공동체를 타파하고 자유사유제를 확립했지만 개인의 사유권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 인간의 소외를 초래했다면서 사회주의 민주혁명은 종법공동체를 타파하고 '자유인 연합체소유'를 확립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사회가 근대를 성취하면서 동시에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관계의 핵심으로 '사회주의 자유인 연합체소유'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사회주의 현대화'는 신좌파가 비판하는 '근대주의'와 분명 다르다. 신좌파는 대부분 근대 극복에만 관심을 둘 뿐 근대 성취의 문제에는 소홀한데, 지은이는 역사학자의 안목으로 20세기 중국사회가 아직 성취하지 못한 근대성, 바꿔 말하면 지금 극복해야 할 '전근대성'의 문제를 천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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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봉건사회의 운행 메커니즘을 이처럼 논리적·실증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를 기초로 당대 중국사회를 설명한 연구는 흔치 않다. 나는 이 책의 시각과 접근방법은 한국사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며, 최소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연고주의와 지역주의, 그리고 권력지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비춰 보는 거울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기대를 해본다.
이 책은 최근 국내외 학계의 몇 가지 논쟁과 관련해서도 읽어 볼 만하다. 우선 중국사나 한국사에서의 봉건사회 존재 여부에 관한 논쟁, 농민의 경제행위나 집단행위를 둘러싼 도덕경제론과 이성적 소농론간의 논쟁, 사회과학계에서 공동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간의 논쟁, 이 공동체주의에 주목하면서 사회과학계뿐만 아니라 인문학자들도 폭넓게 참여하는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내지 유교 자본주의론을 둘러싼 논쟁에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번역과정에서 많은 분들에게 물어서 배우고 도움을 받았다. 위로는 러시아사의 정확한 표기를 확인해 준 한정숙 교수로부터 아래로는 내가 손으로 쓴 원고를 가지런히 타자해 준 신민철 군에 이르기까지 선후배·동학·학생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 책의 출간은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마지막에 몇몇 용어와 구절은 지은이에게 물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번역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사족으로 덧붙이며 이 분들께 감사한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까지 겸해 한국어판 서문을 써준 친후이 교수와,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 책의 출판을 맡아 준 도서출판 이산에 특별히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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