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List

2014년 8월 1일 금요일

금문산서 , 고문상서 논쟁

금·고문 논쟁과 비교
 
20100105 최은비
 
1. 금·고문 논쟁
 
금·고문 논쟁이란 말 그대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논쟁인데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진위에 관한 논쟁을 말한다. 삼경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사서(四書)와 함께 유교의 중요한 경전(經典)을 구성했다. 그런데 이 유교경전들은 중간에 여러 가지 사건으로 많이 유실되고 실전되어 그 원래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그 지도이념을 법가에 기초로 두었고 중국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제자백가의 학설들을 탄압했다. 또 여기에 자신의 통치를 비판하는 유가의 학자들에 대한 진시황의 증오가 더해져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상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모두 거두어들여 불태웠으며 의(醫), 약(藥), 복서(卜筮), 농업 관련 이외의 서적을 민간이 소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도 모자라 진시황은 그 이듬해 무려 460여 명의 유학자를 붙잡아 들여 땅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고 했다.
 
분서갱유 당시 유학에 대한 탄압이 특히 혹심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유가의 경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서경도 실전되어 후세에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 한(漢)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이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유가의 경전들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다. 이 때 복원된 경전들은 당시의 문자체, 즉 금문으로 적었기 때문에 금문상서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경 진본이 발견되었다. 공자의 옛 집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헐었는데 그 속에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인 서경, 예기, 논어, 효경 등의 고대 전적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과두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공자의 11세손인 공안국(孔安國)이 금문상서와 대조해 가며 해석해 주석을 붙였는데 이는 원래 고문(古文)으로 쓰였으므로 고문상서라 불렀다. 또 공안국이 고문상서뿐만 아니라 함께 발견된 예기, 논어, 효경 등에 대해서도 주해를 붙였으므로 여기에서 소위 고문학(古文學)이 시작되었다.
 
금문상서가 진짜냐 고문상서가 진짜냐 하는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된 것은 전한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유흠(劉歆)이 고문상서를 진본으로 인정해 학관(學官)에 고문상서를 전문으로 하는 박사(博士)를 설치하고자 시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금문학파의 학관 박사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함에 따라 유흠과 이들과의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유흠이 패배해 하내태수(河內太守)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당시 금고문논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던지 유흠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왕망(王莽)의 신나라 정권에 협조하기까지 했다.
 
후한(後漢) 시대에 들어와 동중서 등의 노력으로 유학이 한나라의 국학이 되었는데 이때의 학풍은 주로 옛 전적을 해석하고 주석을 붙이는 훈고학(訓詁學)이 주류를 이루었다. 후한시대의 주류적 견해는 고문상서를 진본으로 보았다. 마융과 정현이 다 대표적인 고문학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주해서도 고문상서에 주석을 붙인 것들이었다. 사마휘와 송충은 정현, 진기(陳紀) 등과 더불어 당대의 명유였으며 이들이 다 고문학파였다는 것을 볼때 당시에는 금문상서보다 고문상서가 더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58편의 상서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라는 유학자가 조정에 바쳤다는 매씨상서이다. 매씨상서에는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가 다 수록되어 있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으나 매색이 편을 나누어 33편으로 편집했고 고문상서는 16편으로 구성되었으나 여기에 9편을 더하여 25편으로 구성되었다. 매색의 매씨상서는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정통론의 영향을 받아 정사를 구분하는 명분론적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동진과 비슷한 정치적 환경에 처해 있던 남송 시절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고문상서가 진본으로 인정되었었다.
 
그러나 그의 매씨상서 58편 중 25편의 고서에 대해서는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를 최초로 고증한 것은 청(淸)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고증학자의 하나인 염약거이다. 그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이라는 논문을 통해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조정에 진상한 상서 58편 중 고문상서 25편은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이 주석을 단 공벽고문상서(孔壁古文尙書)와 편수(編數)나 편명(編名)에서 일치하지 않고 또 그 내용 상 위작으로 볼 근거가 많다는 것을 조목조목 실증적으로 비판했다.
 
현재 전해져오는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가 위작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다. 원전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이 아니니 만큼 둘 다 위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후한대의 학문적 성과로 보면 공안국의 고문상서는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 복생의 금문상서는 그가 암기한 내용에 기초했다고는 하나 구술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관이 다분히 가미되었을 수도 있다. 또 현존하는 금문상서 역시 복생의 그것이라고 주장할 명확한 근거도 없다. 금문상서 역시 실전되었다가 동진의 매색이 공안국의 고문상서와 함께 조정에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상서 역시 원래의 공벽고문상서는 소전되었으나 매색이 바친 내용이 완전히 날조라고 볼 수만도 없다. 이미 개인의 주관적 견해가 가미되었거나 없던 내용이 창작되어 추가되었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는 내용을 만들어내었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과거 학문하는 기본 방법이 경전의 내용을 철저히 암송하는 것이었던 만큼 복승이나 매색이 암기했던 내용을 다소의 주관을 넣고 그 당시의 사정에 맞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용어를 바꾼 것이지 날조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금문이든 고문이든 원래의 상서 그대로의 형태는 아니다. 그 후의 연구결과들과 개인들의 신조, 기억들이 어느 정도 혼재되어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서경은 3000편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니 지금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은 그야말로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상서가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거듭되어 왔고 또 실제로 그 유래가 불분명한 점도 많으나 오랜 세월 동안 유교의 최고 경전으로 권위를 지녀왔고, 또 중국인들과 동양의 정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에서 그 사상사(思想史)적 의미는 큰 것이다.
 
2. 금문과 고문의 비교
 
▶ 공자에 대한 입장 차이
금문 경학은 공자를 숭상하며, 공자가 비록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하늘의 명을 받은 사실상의 제왕, 즉 소왕(素王)이라고 본다. 공자를 정치가이자 교육가로 여기는 셈이다. 또한 공자가 옛 것에 의탁하여 제도를 개혁한(托古改制) 인물이라고 간주한다. 이에 비해 고문 경학은 주공(周公)을 숭상하며, 공자를 위대한 스승이자 사학가라고 본다. 또한 공자는 옛 것을 믿고 존중하여 그것을 풀어서 설명했을 뿐(信而好古, 述而不作), 스스로 짓지는 않았다고 간주한다.
 
▷ 경서에 대한 견해 차이
금문 경학은 6경을 모두 공자가 손수 정리했으며, 경학 및 경서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에 비해 고문 경학은 6경이 기본적으로 고대의 사료에 불과하며, 6경이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경서의 배열에서 고문 경학은 6경을 사료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이 출현한 시대의 선후에 따라 배열하여 역, 서, 시, 예, 악, 춘추를 차례로 놓는다. 이에 비해 금문 경학은 6경의 내용적 깊이에 따라 배열하여 시, 서, 예, 악, 역, 춘추의 차례로 놓는다. 또한 금문 경학이 『춘추공양전』을 위주로 하고 경전의 전수과정을 중시하는데 비해, 고문 경학은 『주례』를 위주로 한고 경전의 전수과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 고문 경학의 정치적 입장
고문 경학과 금문 경학의 대립은 단지 학문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전한 말기에 고문 경학파의 대표자 유흠은 당시의 실권자 왕망(王莽 45 B.C.-23 A.D)에 협조한다. 기원후 8년 제위를 찬탈하여 신(新) 왕조를 세운 왕망은 새로운 국가 운영 원리와 이념이 필요했고, 그것을 전한 시대에 유행한 금문 경학이 아닌 고문 경학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유흠은 왕망의 후원 아래 고문 경서인 『주례』에 바탕을 두어 전장제도를 새롭게 정했다. 신나라가 왕망 일대에서 끝나고 광무제가 후한을 세운 이후, 전한 부흥의 목표를 내건 광무제는 금문 경학을 부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오경박사의 자리를 모두 금문학파가 차지했고 고문학파는 배척되었다. 그러나 고문 경학은 학문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기 때문에, 정치적인 부침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가 비교적 착실하게 축적되었고, 결국 후한을 대표하는 경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참고문헌
 
김경한의 블로그. 고문금문 논쟁에 대하여. 2011.
풍우란. 정인재 역.『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1989.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