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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일 금요일

매씨상서평 - 정약용


개 요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이 고문상서라고 칭하는 《매씨상서》의 진위를 고증하여 밝힌 책. 9권 3책. 필사본. 정약용이 말년인 1834년(순조 34)에 저술한 것으로 《열수전서》 권16∼19와 《여유당집》 권20∼24에 수록된 내용을 모아 필사한 것이다. 필사자 및 필사연대는 알 수 없다.


내용구성

편차를 보면

《열수전서》 권16인 〈매씨서평〉1에 먼저 이 책의 저술동기를 밝히고, 이어 총서 · 복생소전금문상서제일 · 공안국소헌고문상서제이 · 두림전고문상서사제삼 · 매색소주공전상서제사 · 건무순전고제오 · 하내태서고제육 · 장패위서고제칠 등,

《열수전서》 권17인 〈매씨서평〉 2에 대서(大序) 1∼4, 정의(正義) 1∼10, 집전(集傳) 1∼10,

《열수전서》권18인 〈매씨서평〉 3에 원사(寃詞) 1∼24,

《열수전서》 권19인 〈매씨서평〉 4에 원사(寃詞) 25∼40, 유의(遺議) 1∼8, 강의(講義) 1∼4,

《여유당집》 권20인 〈매씨서평〉 5에 대우모(大禹謨) · 오자지가 (五子之歌) · 윤정(胤征) 등,

《여유당집》 권21인 〈매씨서평〉 6에 중훼지고 · 이훈(伊訓) · 태갑(太甲) 등,

《여유당집》 권22인 〈매씨서평〉 7에 함유일덕(咸有一德) · 열명 (說命) · 태서(泰誓) 등,

《여유당집》 권23인 〈매씨서평〉 8에 하내태서(河內泰誓) · 무성(武成) 등,

《여유당집》 권24인 〈매씨서평〉 9에 미자지명(微子之命) · 주관(周官) · 군진(君陳) · 군아(君牙) · 경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씨상서의 진위 고증

〈매씨서평〉 1의 서두에 “일찍이 내가 서울에서 공부할 때 사우간에 《매씨상서》 25편의 문체가 비순하다는 말을 듣고 의심한 바 있었으며, 1792년(정조 16) 희정당에서 〈우공편〉을 시강할 때 임금께서 금문 · 고문에 대해 수 백조를 물으셨으나 이에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이제(1834년) 《매씨상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모아 책을 저술하고 보니 임금(정조)이 안 계신 지금 한스러운 마음이 든다.”고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서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하여 인몰된 후에 한대에 이르러 복생(伏生)의 구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금문상서’라 한다. 이와는 별도로 공자의 옛집을 헐을 때 벽속에서 나왔다는 《서경》이 있었으나 고문자인 과두문자로 되어 있어 해독하지 못하다가 한나라 무제 때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이를 금문으로 번역하여 읽었는데 이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하였다. 그러나 이 《고문상서》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쓰이지 않아 차차로 없어지고, 동진시대(東晋時代) 매색이 공안국의 《고문상서》를 얻었다 하여 저술한 《위고문상서 僞古文尙書》가 전하여지는데, 이 책의 진위문제가 학자들 사이에 논란되어왔다.

저자는 이를 밝히기 위하여 공영달의 《상서정의》, 채침의 《서집전》, 모기령의 《원사》 및 선유의 제설을 인용, 《금문상서》와 《고문상서》의 내용을 일일이 고증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있으며, 매색의 《위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밝히고 있다. 《서경》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http://www.tasan.or.kr/02_tasan/annotate_05.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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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전거를 뒤흔든 저서
 
 서명 : 역주 매씨서평
 글쓴이 : 이봉규(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역자 : 정약용 지음/이지형 옮김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2002-12-27 / 1054쪽 / 60,000원
1.
한당 시대에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현들은 그저 존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유학자들은 성현의 경지가 아득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성현이나 범인 모두 참된 본성을 동일하게 구비하고 있지만, 단지 타고난 기질의 차이로 인해 달라진 것이고, 이 차이는 부단한 공부와 실천으로 극복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기질의 차이를 극복하여 본래 주어진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유학의 본령이며, 역대 성현들이 일깨우고자 한 핵심적 메시지라고 여겼다. 송대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집대성한 학자는 바로 주희(朱熹 :1130-1200)였다.

주희는 유학의 본령에 대한 성현의 근본 메시지를 순(舜)이 우(禹)에게 전한 말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전거는 {상서}(尙書) [대우모](大禹謨)에 실려 있는 것이었다. 16글자로 이루어진 순임금의 말을 주희는 불교에서 깨침의 종지를 전하는 법처럼 유학의 전법(傳法)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 전법을 중심으로 사서를 비롯하여 유학의 텍스트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 하였다. 주희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는 한당 시대를 넘어서 유학의 본래 이념을 새롭게 드러낸 사상사적 혁명이었다.

주희이후 주희의 사상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이기론과 심성론 등, 이론적 해명에 대한 보완과 비판이다. 둘째는 이론적 전거와 텍스트의 본래 문맥에 대한 보완과 비판이다. 전자는 주희의 계승자들, 양명학자들, 왕부지 등 반청적 재야 학자들, 마테오리치 등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후자는 사고전서의 성립과 더불어 가속화된 고증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양 측면에서 함께 일가를 이룬 학자는 극히 드물다. 그 가운데 가장 성찰적이고도 방대한 성과가 19세기 초엽 조선 남도의 유배지에서 한 조선 학자에 의해 이룩되었다. 바로 정약용(丁若鏞 : 1732-1836)이다. 그는 18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 경학과 경세에 대한 유학의 본령을 이론과 고증 양 측면에서 새롭게 집대성하였는데, {매씨서평}은 그 가운데 주요한 한 가지 성과였다.

2.
정약용의 학문적 성취는 대체로 출사이전, 출사이후-유배기, 유배이후 등 세 단계를 거쳐 이룩된다. 정약용은 10대 후반부터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 등 성호좌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이익의 문하에서 주희의 주요한 이론들을 비판하고 서학과 서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신진세력이었다. 정약용은 권철신의 묘지명을 쓰면서 자신의 주요한 성찰 일부가 성호좌파로부터 계승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정약용은 28세에 출사한 뒤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어 정조가 주도하는 학문적 연구와 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때, 정조의 정치적 문제의식과 당시 청조에서 이룩된 학문적 성과와 흐름들을 직접 접하면서, 자신의 정치적·학문적 문제의식을 숙성시켜나갔다. 그러나 서교와의 관련으로 가족과 지우들이 형을 받으면서, 정약용도 10여 년의 관직생활 끝에 결국 18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강진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 동안 자신의 성찰을 경학과 경세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통해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홍석주와 홍현주 형제, 김매순 등 당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성찰을 계속 보완하였는데, {상서}에 대한 연구에서 특히 그러했다.

정약용은 유배시절 동안 {상서}와 관련해서 {매씨서평}(梅氏書平)(1810년 봄), {고훈수략)(古訓蒐略)(1810년 가을),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1811년 봄) 등을 저술하고,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뒤로 신작, 홍석주, 홍현주, 김매순, 김기서 등과 교유하면서 {상서}에 관한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수정 보완하였다. 특히 {매씨서평}에 대한 개정은 1827년 겨울에 홍석주, 홍현주 형제를 통해 얻어 본 염약거(閻若  : 1636-1704)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염약거의 저서에 대한 연구로서 {염씨고문상서소증초}(閻氏古文尙書疏證抄)를 쓰는 한편, 1834년에 {고훈수략}과 {상서지원록}을 합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재편하고, {매씨상서평}에 대한 개정 작업도 완성하였다.

{매씨서평}은 동진(東晋) 때 매색(梅 )이 바쳤다는 고문상서(古文尙書) 25편이 위서임을 고증한 책이다. 고문상서의 위작설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성호좌파에서 제기된 것으로, 정약용은 초계문신 시절 모기령(毛奇齡)의 {고문상서원사}를 접하면서 그 문제의식을 더욱 심화시켰다. 모기령의 저서는 고문상서의 위작설에 대한 염약거의 논증을 반박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었는데, 정약용의 {매씨서평}은 모기령의 설을 반박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다만 정약용은 염약거가 {고문상서소증}을 반박하기 위하여 모기령이 {고문상서원사}를 저술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홍현주, 홍석주 형제를 통해 염씨의 저서를 얻어 보고서야 {매씨서평}과 같은 작업이 이미 청의 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비로소 발견하고, 염씨의 설을 수용하여 {매씨서평}을 보완하는 한편, 염씨의 저서에 대한 자신의 요약과 견해를 글로 남긴다. 그리고 이 글들은 일제 강점기에 {여유당전서}가 간행되면서 {매씨서평}의 마지막 부분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희가 전법으로 내세웠던 순임금의 메시지는 바로 고문상서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밝히는 것은 바로 사상사의 한 획을 그었던 주희의 이론적 전거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의미심장한 작업이다. 그런데 염약거의 {고문상서소증}과 비교해볼 때, 정약용의 {매씨서평}이 가지는 특징은 이론과 고증 양 측면에 걸친 정약용의 문제의식이 복합적으로 깃들어 있는 점이다. 염씨의 저서는 고문상서의 위작설을 입증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고, {상서}를 유학의 텍스트로서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달리 말하면 유학의 본령에 대한 저자 자신의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경학사의 측면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지만, 철학사적 측면에서는 빈약한 내용이다. 반면에 {매씨서평}은 {상서}를 유학의 텍스트로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약용 자신의 사상적 기획 속에서 저술되었다.

정약용은 주희가 성현의 전법으로 내세운 순임금의 메시지 자체가 편집된 것이라고 해도, 내용상 유학의 사상적 지향을 담고 있는 메시지로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유학의 전법 내지는 {상서}의 핵심 메시지는 [대우모] 자체가 위작인 이상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는데, 정약용은 그에 관해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에 기반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즉 그는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매씨서평}을 통해 밝히면서, 아울러 금문상서 28편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상서지원록}(뒤에 {상서고훈}으로 재편)으로 정리하였는데, 여기에는 [대우모]에 기반해서 유학의 본령을 읽었던 주희의 독법에 대한 대안으로써 [고요모]를 중심으로 읽는 새로운 독법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정조가 가지고 있던 국가 운영의 정치적 문제의식을 [고요모]의 관인(官人)과 혜민(惠民)의 관념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재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매씨서평}의 저술은 {상서지원록}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고증과 이론의 양측면에서 주희의 철학적 성찰을 넘어서려는 정약용의 새로운 시대적 문제의식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점은 경전의 연구를 통해 현실개혁의 이론적 기반을 재정립하려는 조선 실학의 기풍으로 청대 고증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취적 모습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맹자요의}를 세심하게 역주한 바 있는 이지형 교수의 {역주 매씨서평} 번역은 성균관대학교 재직시절부터 진행된 것으로, 정년 뒤에도 건강을 돌보지 않고 다산 경학사상의 규명에 일로매진한 결과 이룩된 것이다. 양적 팽창보다 질적 심화가 절실히 필요한 우리 인문학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지형 교수의 {역주 매씨서평}은 일관지사(一貫之士)의 장인적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쾌거임에 틀림없다. 이제 번역에 참여하고 도왔던 제자들이 {매씨서평}과 짝을 이루는 {상서고훈}을 이어서 번역해낸다면 정약용의 사상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들의 노력으로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적 전통이 우리 시대에 더욱 굳건해지기를 기대해본다.

서경 書經

개요

《서경》은 요임금(堯, 기원전 2356년? ~ 기원전 2255년?[3])부터 주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시대까지 (堯) · (舜)의 2제와 우왕(禹王) · 탕왕(湯王) ·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3왕들이 신하에게 당부하는 훈계와 군왕이 백성에게 내린 포고와 명령, 군왕에게 올린 신하의 진언, 전쟁을 앞두고 백성과 장병들에게 한 훈시, 대신들 사이의 대화 등을 담고 있다.
《서경》은 서약(誓約)하는 글인 "서(誓)"와 고시(告示) 또는 포고(布告)하는 글인 "고(誥)"가 주가 되어 있다.[4]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것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4]
이들 중 〈목서(牧誓)〉에서 주나라 무왕은 "지금 저 발(發)은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고자 합니다(今予發惟恭行天之罰 · 금여발유공행천지벌)"라고 말하고 있는데, 《서경》의 글들은 모두 이와 같이 조상신(祖上神) 혹은 상제(上帝)에 대한 신앙이나 노예 사회에서의 의 권력을 보여주는 무겁고 엄격한 색조(色調)로 일관되어 있다.[4]

성립

《서경》은 3000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고문(古文) 25편, 금문(今文) 33편 등 58편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원본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문은 한나라 경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 벽에서 발견한 춘추시대의 문자체(진(晉)나라의 문자)로 씌여진 고본이고, 금문은 구전된 것을 한나라 문제 때 복생(伏生)이 당시 통용되던 예서로 정리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별차이가 없었다고 하나 이후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로 나뉘어 전수되었다. 고문상서는 동한 광무제 때 무성편이 서진 말기에 나머지 15편이 전부 없어졌고, 현재는 위고문상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공안국의 위고문상서는 동진 원제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위고문상서를 조정에 바쳐진 후 청나라 때까지 천여 년 동안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공안국 혹은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현행본 58편 가운데 이르바 '오고'라고 일컫는 대고, 강고, 주고, 소고, 낙고와 금등, 자재, 다사, 다방 등이 서경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성립이 된것으로 주나라 초기의 기록이라고 한다. 오고는 문체가 가장 난해하여 더 고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때 고요모에는 사상적으로 노장철학과 유가철학이 분화되지 않은 것도 옅보여 고오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5]

구성

《서경》은 모두 5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3편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부르고 나머지 25편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한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지만 일부를 분할하여 편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BC 4세기 이전에 작성된 진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문상서는 원래 16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오래전에 소실되었다. 4세기에 나타난 모작은 원본의 제목을 붙인 16편에 9편을 더하여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5편은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舜)의 말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6~9편은 하나라(夏,기원전 2205년경 ~ 기원전 1766년경)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몰락(기원전 1122년)에 대한 기록인데, 은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인 주왕이 타락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주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 32편은 기원전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尙書

유교의 사서삼경 중에 하나로 요순시대하나라상나라주나라의 왕들이 내린 포고문, 신하들의 상소, 왕의 연설문 등 각종 정치문헌을 모아둔 것이다.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의 국가기록을 정리한 것이라 역사서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원래는 정치문헌들을 그냥 문서란 의미의 서(書)라고 불렀는데, 전한 시대에 유학이 국가이념이 되자 존중의 의미를 담아 상(尙)자를 붙여 상서라고 불렀다. 이후 송나라가 되면 삼경에 든다는 의미로 서경(書經)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이야기가 도는 물건이니, 당연히 분서갱유의 피해를 입어 대부분의 상서는 소실되었다. 진나라의 통치가 끝나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유학자들은 이를 학자들의 기억과 몰래 숨겨두었던 죽간에 의존해 복원했고, 한나라 때의 필체로 다시 기록하여 읽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서가 재구성된 이후 보급되어 읽히는 중에 문제가 생겼다. 공자가 살던 집을 헐어보니 벽 안에서 춘추전국시대 당대의 필체로 쓰인 상서의 죽간이 발견된 것. 이를 옛 글로 쓰인 것이라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라 불렀고, 분서갱유 이후 재구성한 것을 당시의 글로 쓰인 것이라 해서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불렀다.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내용면에서 차이가 있었고, 이후 고문을 지지하느냐 금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파가 나뉘어 치열한 논쟁의 막이 올랐다.

그러던 중 위진시대에 와서는 고문상서는 아주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동진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고문상서를 찾아다 황제에게 올렸지만 내용의 진위문제로 인해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당나라때는 공영달(孔穎達)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면서 매색의 것을 토대로 금문과 고문을 모아 해석을 붙여 재구성하였는데, 이후 명나라 때 매작(梅鷟)과 청나라 떄 염약거(閻若璩)가 매색의 고문상서가 가짜임을 밝혔다. 매색의 고문상서는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혹은 가짜 고문상서라고 부른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홍재전서 제93권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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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강의(經史講義) 30 ○ 서경(書經) 1 신축년(1781)에 선발된 홍이건(洪履健), 홍인호(洪仁浩), 이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이종섭(李宗燮), 조윤대(曺允大), 이동직(李東稷), 이현묵(李顯默), 이익운(李益運), 박종정(朴宗正) 등이 답변한 것이다
[총론(總論)]

한대(漢代)에 이르러 육경(六經)에는 모두 사승(師承)이 있어 하나의 경전에도 제가(諸家)들의 책 또한 각기 달랐다. 예를 들면, 《주역(周易)》에는 세 가지, 《시경(詩經)》에는 네 가지, 《춘추(春秋)》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 유가 바로 이것인데, 자구(字句)의 많고 적음과 훈고(訓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경전의 전체로써 논한다면 일찍이 같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상서(尙書)》만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차이가 있는데, 하나는 28편이고 또 다른 하나는 58편이니, 이는 자구와 훈고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편장의 수가 거의 갑절이 된다.
이제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을 살펴보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다. 공안국(孔安國)이 왕명을 받아 《고문상서》의 전(傳)을 지은 것은 한 무제(漢武帝) 말엽이었는데, 이를 비부(祕府)에 올린 후 미처 반포, 간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책이 비부에 있었지만 외부인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한서(漢書)》와 《정의(正義)》는 도위조(都尉朝)로부터 아래로 매색(梅賾)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이 전수한 사람들을 대략 말하고 있으나 한대(漢代) 이후 여러 유학자들은 모두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상서》의 문장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나 모두가 《금문상서》일 뿐, 《고문상서》는 일찍이 쓰지 않았다. 조기(趙岐)의 《맹자(孟子)》 주해(註解), 고유(高誘)의 《여람(呂覽)》 주해, 두예(杜預)의 《좌전(左傳)》 주해에서는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편 안의 글에 대하여 모두 일서(逸書)라 말하였는데, 유독 《후한서(後漢書)》에서만은 “가규(賈逵)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이 모두 두림(杜林)에게서 《고문상서》를 얻어 주해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정의》에 실린 편목(篇目)을 살펴보면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은 일찍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복생(伏生)의 《금문상서》만을 취하여 일서(逸書) 100편의 편명을 뒤섞어 58편의 수효를 맞추었을 뿐이다. 이로 보면, 이 세 사람 역시 진짜 《고문상서》를 본 사람이 아니다.
허신(許愼)은 《설문(說文)》을 지으면서 “《서경》은 공씨(孔氏)의 것을 인용하였다.”고 말하였지만 이제 《설문》 12편에 인용된 《상서》의 자구(字句)를 살펴보면 모두가 《금문상서》일 뿐, 공안국의 《고문상서》는 한 글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허신 역시 《고문상서》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이는 한대 이후부터 영가(永嘉) 말엽에 이르기까지 명사와 석유(碩儒)들은 한 사람도 이를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천 년 동안 산일(散逸)되었던 책이 장강(長江) 남쪽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뒤 혼란한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점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진(晉) 나라 때 비부(祕府)에 《고문상서》가 있었다. 매색이 올린 것은 공안국의 전(傳)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두문자(科斗文字)로 쓴 책이 비부에 들어간 이후, 왕망(王莽)ㆍ동탁(董卓)ㆍ유석(劉石) 등의 난을 겪으면서 난대(蘭臺 한대(漢代) 궁 안에 있던 문고(文庫))에 소장된 서적들은 거의가 불타 버렸을 것인데, 칠서(漆書 옻칠한 대쪽에 쓴 책)와 죽간(竹簡)이 전쟁의 와중에 잘 보관되어 왔다고 하니, 이것을 어떻게 굳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의문점이다.
문체로 말하면, 복생의 문장은 까다롭지 않은 글이 없는데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편들은 하나같이 평이하다. 상서(商書)의 글은 평이한데 반경(盤庚)과 미자편(微子篇)은 읽기 어렵다. 그것이 곧 금문(今文)이다. 주서(周書)의 글은 읽기 어려운데도 태서(泰誓)와 무성(武成) 편은 평이하다. 또 이는 고문(古文)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의 차이가 있으나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을 합하여 살펴보면 문장과 자구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거슬림이 없으니, 이 또한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비록 그 문장이 《논어(論語)》ㆍ《맹자》ㆍ《좌전》ㆍ《국어(國語)》ㆍ《예기(禮記)》ㆍ《순자(荀子)》 등의 고문을 인용한 부분에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설령 위작한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널리 여러 서적을 고찰하여 편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의문점이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도 일찍이 이를 의심하여 “내 일찍이 공안국의 《상서》가 위서(僞書)라 의심해 왔다.” 하였고, 또 “공안국의 《상서》가 동진(東晉)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왔다. 그 이전의 유학자들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였고, 또 “《서경》에서 대체로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고문상서》이며, 읽기 난해한 것은 모두 《금문상서》이다.” 하였고, 또 “어떻게 수백 년 동안 벽 속에 소장된 책이 한 글자도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말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주자가 평소에 말한 논지를 대략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채침(蔡沈)의 《집전(集傳)》 서문에서 “이전(二典 요전(堯典)과 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는 일찍이 주자가 시정해 주었다.”고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주자가 여러 경전에 주석을 많이 썼고, 심지어는 《이소경(離騷經)》과 《참동계(參同契)》 유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상서》에 대해서는 유독 없는데, 또한 그 사이에 은미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인가?
만일 《상서》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면 어째서 하나의 변(辨)을 지어 위서임을 밝히지 않고 도리어 문인에게 《집전》을 짓도록 하였겠는가. 이제 만약 《고문상서》가 참으로 의심스러운 것이라면 대우모의 16글자와 태갑(太甲)ㆍ열명(說命)의 아름다운 말과 생각, 주관(周官)의 제도는 모두 허황한 것이 된다. 이는 성학(聖學)의 핵심이며 경학의 관문이다. 경학을 궁구하는 선비들은 반드시 널리 고찰하고 깊이 헤아린 것이 있을 것이니, 분명한 논을 듣고자 하는 바이다.
[이석하(李錫夏)가 대답하였다.]
《고문상서》에는 본디 의문점이 많으니, 첫째는 문체가 같지 않음이며 둘째는 전수(傳授)의 증거가 없다는 점인데, 이미 성상의 질문에서 모두 말씀하셨으므로 다시 언급할 것이 없으나 더욱 의심이 되는 것은 태사공이 “친히 《고문상서》를 공안국에게서 전수받았다.”고 말하였는데 《사기》에 인용한 탕고(湯誥)의 문장은 현재의 탕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사공이 보았을 다른 편 역시 오늘날 전해 오는 탕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즘 이른바 매색이 올렸다고 하는 것은 그 원류를 살펴보면, 매색은 장조(臧曹)에게서, 장조는 양유(梁柳)에게서, 양유는 소유(蘇愉)에게서, 소유는 정충(鄭沖)에게서 얻었다고 하며, 정충 이상은 전혀 사승(師承)이 없고, 마융ㆍ정현의 계통과는 중간에서 단절되었으니, 원래 도위조(都尉朝) 이하와 맥락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자 또한 일찍부터 자주 의심해 왔습니다.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타난 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삼가 주자의 평소 논지를 취하여 유별로 모아 깊이 궁구하여 보면 의심만 하였을 뿐, 일찍이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전(二典)과 대우모를 일찍이 시정하였고, 평소 해설을 힘쓰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재 채침의 《집전》의 문장은 주자의 설이 열에 일고여덟이니, 실제로는 주자의 《집전》인 셈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전의 주석에 널리 미쳤으나 《상서》에 미치지 않은 것은 겨를이 없었을 뿐이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마음속으로 그것이 위작임을 알고 착수하지 않으면서 문인에게 명하여 구차스럽게 해석하게 할 리 있겠습니까. 주자가 이 책을 높이 믿고 표장(表章)하였음을 이로 인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총론(總論)이다.

[주D-001]《상서(尙書)》 : 《서경(書經)》의 별칭이다. 《서경》은 상고(上古) 시대에 사관이 정사(政事)를 기록한 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선진(先秦) 이전에는 단순히 《서(書)》라 하였을 뿐, 《상서(尙書)》라 하지 않았다.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상서》라는 이름은 복생(伏生)으로부터 비롯하였다.” 하였다. 서(書) 위에 ‘상(尙)’ 자를 더한 명의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학설로 집약된다. 공안국(孔安國)은 “상고 시대의 서적이기 때문에 《상서》라 한다.” 하였고, 왕충(王充)은 “혹자는 《상서》에 대해 말하기를, ‘상(尙)이란 위를 말하니, 윗사람이 한 일을 아랫사람이 쓴 것이다.’ 한다.” 하였고, 정현(鄭玄)은 “상(尙)이란 ‘높이다’는 뜻이니, 하늘에서 내려 준 책처럼 존중해야 할 책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말 가운데 공안국의 말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國學導讀叢編 國學槪論》
[주D-002]금문(今文)과 …… 58편이니 : 본서에서는 금문과 고문 2종으로만 말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밖에 ‘위고문(僞古文)’도 있어, 일찍이 《상서》는 금문, 고문, 위고문 3종으로 전수되어 왔다. 금문은 한예(漢隸)로, 고문은 선진(先秦) 고전(古篆)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이는 문자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경의(經義)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고문과 금문 양파(兩派)로 나뉘어지고 있다. 《금문상서》는 모두 28편이며 복생(伏生)으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사기》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복생은 진시황 때 박사(博士)였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자, 복생은 벽 속에 책을 숨겨 놓았다가 한 나라가 평정되었을 때, 다시 그 책을 찾았으나 수십 편을 잃어버리고 29편만을 찾아 《상서》가 전해졌다.” 한다. 여기에서 말한 29편이란 고명(顧命) 1편을 고명과 강왕지고(康王之誥)로 나누어 2편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나누면 29편이 되고 고명과 강왕지고를 하나로 합하면 28편이 된다. 따라서 본서에서 말한 28편은 《금문상서》의 29편이다. 《고문상서》는 선진 고문자(古文子)로 쓰여진 것 2종을 말한다. 그 하나는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소장본으로 전수되지 못하여 한대(漢代)에 이미 잃어버렸고, 또 다른 하나는 공자의 집 벽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금문상서》에 비해 16편이 더 수록되어 있다. 이를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얻어 조정에 올렸으나 공안국이 무고(巫蠱)를 당함으로써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세칭(世稱) ‘공벽서(孔壁書)’ 《고문상서》이다. ‘위고문’은 《고문상서》의 위작으로 이 또한 2종이 있다. 하나는 서한(西漢)의 장패(張覇)가 지었다는 102편으로 이미 유실되어 전해 오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바친 《고문상서》 58편으로, 공안국의 전(傳)까지 함께 바쳤는데, 이 공안국의 전은 위작한 것이어서 엄격히 말하면 《상서》 위공전(僞孔傳)이다. 여기에서 말한 58편은 복생의 《금문상서》 29편을 33편으로 나누고 이에 위작된 25편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 통행되는 《상서》 위공전이다. 《國學導讀叢編 書經導讀》
[주D-003]과두문자(科斗文字) : 전자(篆字) 이전에 사용된 최고(最古)의 문자로, 글자의 획이 올챙이의 모양과 같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4]대우모의 16글자 :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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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 서경 강의 중 '함유일덕'

홍재전서 제98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5 ○ 서경(書經) 6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
[윤정(胤征)]
[탕서(湯誓)]
[중훼지고(仲虺之誥)]
[탕고(湯誥)]
[이훈(伊訓)]
[태갑 상(太甲上)]
[태갑 중(太甲中)]
[태갑 하(太甲下)]
[함유일덕(咸有一德)]
[반경 상(盤庚上)]
[반경 중(盤庚中)]
[반경 하(盤庚下)]
[열명 상(說命上)]
[열명 중(說命中)]
[열명 하(說命下)]
[고종융일(高宗肜日)]
[서백감려(西伯戡黎)]
[미자(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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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강의(經史講義) 35 ○ 서경(書經) 6
[함유일덕(咸有一德)]

착한 일을 하면 상서를 내리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재앙을 내리는 것은 천도(天道)의 떳떳함이니,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인데도 “하늘은 믿기 어렵다.”고 함은 무엇 때문인가?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천도가 복선화음(福善禍淫)함은 바로 떳떳한 이치입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호응하는 것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라 지금 선을 하면 복을 주고 다음날 음란하면 화를 주니, 하늘에 있어서는 일정한 명(命)이 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정하지 않은 명이 되므로 ‘믿기 어렵다’고 했던 것입니다.

‘권구일덕(眷求一德)’에서, 구(求) 자는 《시경》의 ‘구민지막(求民之莫)’의 구와 같으니, 하늘이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맡기는 데 있어 구하는 데에도 뜻을 둔 것인가? 오직 하늘이 총명한 사람을 내었다면 낼 때에 이미 얻었는데, 또 무엇 때문에 구한단 말인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구’라는 한 글자에서 하늘의 지극히 공평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혁명하여 하(夏) 왕조를 타도하고 상(商) 나라를 여는 뜻은 걸(桀)의 죄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탕(湯)임금의 덕이 능히 천심(天心)에 맞게 되는 날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앞서 정해져 있어서, 도리어 기수(氣數)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늘이 하 나라의 명을 끊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걸의 죄가 저와 같으므로 끊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끊고는 또 덕 있는 사람을 구하여 큰 임무를 내리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탕임금이 두텁게 권우(眷祐)를 받은 까닭입니다. 구하여 얻은 뒤에는 또 하늘이 탕임금을 낸 것이 본래 우연일 뿐이 아니므로 “하늘이 곧 왕에게 용맹과 지혜를 내려 주었다.” 하였으니, 성인의 말씀이 정밀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유윤궁기탕 함유일덕(惟尹躬曁湯咸有一德)’은, ‘유윤궁극좌우궐벽(惟尹躬克左右厥辟)’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매번 스스로 그 자(字)를 칭하였으니, 임금 앞에서 칭하는 자는 옛날과 지금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니면 또 은(殷) 나라 사람은 질(質)을 숭상했으므로 그러한 것인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윤(尹)이 이름인지 자인지는 그 설이 한결같지 않아 적당한 것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자라면 임금 앞에서 신하는 이름을 부른다는 법도에 어긋납니다. 소(疏)에, “옛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니 후대의 예절로 요약할 수 없다.” 하니, 이치가 혹 그럴 만합니다.

‘궁기탕 함유일덕(躬曁湯咸有一德)’이라는 말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윤이 혐의하지 않았음은 무엇 때문인가? 선대 유학자들은 비록 자임하는 기상으로 논하였지만, 일의 공은 본래 자임할 수 있어도, ‘덕’이란 한 글자를 그리 쉽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가? 옛사람들이 스스로 칭함에 부덕(否德)이나 과덕(寡德)이라 하며, ‘덕’이라는 말을 스스로 부담하지 않았다. 더구나 순일하여 잡되지 않은 덕이라는 말은 극도로 찬미하는 뜻이 되는 데이겠는가. 또 하물며 스스로 선왕에 비하는 데이겠는가. 만약 고요가, “내가 순임금과 함께 밝은 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체면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성인이 도에 나아가는 마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조예가 고명하고 공화(功化)가 융성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평가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여 물러나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큰일을 맡고 큰 책임을 감당할 때에 이르러서는 혹 사양하고 겸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윤이 부름에 응한 처음에 천민(天民)의 선각(先覺)으로서 자인하였다가, 오늘 도리어 혐의쩍은 자취를 돌아보고 짐짓 물러나 피하려는 말을 한다면 문득 성실한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원로(元老)로서 어린 군주를 권면하는 즈음에 또 어찌 그 진실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고요가 순임금에게 있어서 현명한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만나 충성스러운 신하가 기뻐하여 일하면 다스림이 흥기되는 것[明良喜起]이 성대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탕임금이 배운 뒤에 신하로 삼은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니, 아마도 비교하여 같다고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좌우유기인(左右惟其人)’은, 이윤이 이미 군신동덕(君臣同德)으로써 태갑을 권면하였고 또 좌우를 그 적임자로 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물러났으니 태갑이 장차 어떤 동덕과 같이 천직(天職)을 다스리겠는가. 대신이 장차 물러나려 하면 마땅히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윤이 천거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글에서 고찰할 수 있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태갑이 이미 허물을 고치고 덕을 마쳤으니 일대의 어질고 뛰어난 사람, 곧 구단(咎單)이나 이척(伊陟 이윤의 아들)과 같은 무리들이 필시 조정에 늘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윤이 비로소 물러나려 한 것이지만 누구를 천거하여 대신하게 했는지는 다시 상고할 수 없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억지로 대답하겠습니까.

‘유화유일(惟和惟一)’의 일(一)은 ‘임현일사(任賢一事)’의 일이고 ‘통체일덕(統體一德)’의 일은 아닌가? 나누고 합하는 것이 비록 크고 작음이 있으나 그 실은 같은 것이 아닌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어진 사람에게 맡기는 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순일하고 잡되지 않은 덕에 근본하므로 ‘유일’은 곧 일덕(一德)의 한 가지 일이니, 대소는 비록 다르지만 체용(體用)은 실로 서로 의지합니다.

‘선무상주 협우극일(善無常主協于克一)’에 대하여 장남헌(張南軒)은 “이 말이 매우 좋다.”고 하며 ‘정일(精一)’의 훈계와 비교하였다. 이윤이 요순의 도를 즐겼기 때문에 순임금과 우가 주고받은 은미한 뜻을 가져와 태갑에게 일러 주었는데, 그 훈계하는 말을 살펴보면 ‘주선(主善)’은 ‘유정(惟精)’이고 ‘협일(協一)’은 ‘유일(惟一)’이다. 그런데 ‘집중(執中)’의 뜻은 보이지 않으니 왜인가? 일(一)이 곧 중(中)이기 때문에 그런가?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인군의 덕이 선을 주로 하여 일(一)에 합치되면 이것이 바로 천하의 선을 택하고 천하의 중(中)을 때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선유들이 말한 바 ‘주선협일(主善協一)’ 네 글자가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무자광이협인(無自廣以狹人)’은, 소주에 신안 진씨가, “일덕(一德)이 비록 온전하더라도 더욱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는[自足] 안 된다.” 하였으니, ‘자족’은 곧 ‘자긍(自矜)’이다. 사람이 자긍하기 때문에 덕이 온전하지 못하니, 덕이 이미 온전한데도 자긍하는 병통이 있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일덕이 이미 온전해지면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덕이 성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기 쉬우므로 진씨가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대체로 힘쓰고 그만두지 않는 뜻을 논하여 이윤이 이것을 말한 본의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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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31일 목요일

하늘도 감동한 이윤(伊尹)의 성품

하늘도 감동한 이윤(伊尹)의 성품
글 연구위원 김성호


공사 3장 39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쓰신 글귀 중에 이윤(伊尹)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이윤에게 있다(桀之亡湯之興在伊尹)’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상제님께서는 그가 성탕을 도와 대업(大業)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일을 도수로 굳게 짜 놓았다고 말씀하시고, 이 도수가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린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상제님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그에 의해서 좌우된 두 임금의 흥망성쇠를 언급하시고, 나아가 이윤이 성탕을 도와 대업을 이룬 일을 후천의 새 기틀을 여는 개벽공사에 까지 쓰셨을까?


걸왕의 폭정과 이윤의 간언
그는 원래 은(殷)의 주왕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포악무도한 폭군으로 손꼽히는 걸왕 밑에서 선관(膳官)으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걸왕의 신하였을 당시는 걸왕(桀王)이 주변의 모든 제후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걸왕은, 정사(政事)는 뒷전인 채 궁전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주색에 빠져 악행만을 일삼았다. 그의 무도함은 도의(道義)에 어긋남을 넘어 죄 없는 백성들까지 무참히 살육하고, 제후국을 침략하여 법도를 짓밟는 등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불안에 떨며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나날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눈에 걸왕은 국가의 멸망을 재촉하는 폭군이자 광인(狂人)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이때 이 같은 광경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해 걸왕에게 학정(虐政)을 자제할 것을 간언한 충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윤과 관룡봉(關龍逢)이었다.
먼저 관룡봉이 무너져 가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해 걸왕에게 선대(先代)의 어진 임금들을 본받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하늘이 천명(天命)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하지만 걸왕은 도리어 충간(忠諫)을 한 관룡봉을 참살시켰다. 이에 당시 선관의 벼슬에 있었던 이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걸왕에게 또 다시 간언(諫言)했다. 그는 걸왕에게 관룡봉을 참살시킨 일과 더불어 그가 정치의 상도(常道)를 어겨 천심(天心)과 민심(民心)을 모두 잃었음을 말하고 더 이상 백성들을 혹세무민하지 말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걸왕은 이윤의 간언 또한 귀담아 듣지 않았다.
농민으로 돌아간 이윤, 박 땅에서 탕에게 초빙되다
걸왕 자신으로 인해 망국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걸왕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나날이 더 포악해져만 갔다. 걸왕의 이 같은 모습에 이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더 이상 미치광이 걸왕을 개도시킬 방법은 없어보였다. 이에 이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박()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왕을 떠나 박 땅으로 간 그는 한 동안 그곳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지내며 요순(堯舜)의 도(道)를 마음에 품고 살았다. 당시 그는 초야에 묻혀 생활하느라 행색은 비록 남루할지라도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고, 수천 필의 말을 준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만은 여전히 강직했다.
한편 이런 그의 성품을 알아본 탕은 정중히 폐백을 갖추어 그를 초빙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윤은 탕의 신하가 되는 것이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처음에는 탕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같은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탕은 이윤 같은 어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수차례에 걸쳐 이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이윤도 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요순의 도를 혼자 실천하는 것보다는 탕을 요순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시대의 백성들로 만들 것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탕의 신하가 되었다.
이 내용은 『典經』에 기록된 상제님 말씀과 부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도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 사십 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공사 3장 37절)고 말씀하신 바 있다. 상제님의 이 말씀은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윤이 50년이 되어서야 49년 동안의 삶이 헛되었음을 깨닫고, 그동안 실행할 여건이 되지 못해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던 뜻을 성탕과 함께 펼쳤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평성대를 위한 결의를 실행에 옮기다
한편 그가 탕의 신하가 되었을 당시 주변의 제후들도 탕이 덕을 수양한다는 사실을 알고 걸왕을 뒤로 하고 탕에게 모여들었다. 제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탕에게 귀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 걸왕의 폭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쉽게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헌데 이윤은 이들이 귀순하기 이전부터 걸왕의 폭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아픔을 탕에게 고하고, 나아가 탕이 요순(堯舜)의 도(道)를 받들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해야 한다는 큰 계획을 상신했다.
그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한 방안으로 탕에게 소왕(素王)과 구주(九主)에 관해서 말하고 법술과 상벌로 탕을 보좌해 요순의 도를 재현시키려 했다. 탕 또한 그의 이 같은 점을 높이 사 우상(右相)이라는 위치까지 하사했는데, 우상이 된 이후에도 그는 탕의 치세(治世)를 도와 탕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로써 성탕은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어진 정치로써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탕은 하늘에 계신 상제께 죄를 지은 걸왕을 벌하여 달라고 기원하기에 이른다. 검은 황소를 하늘에 바치며 상제께 기원한 결과 하늘은 탕에게 걸왕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는데,『書經』의 기록에 따르면 ‘탕왕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은, 그 때 이윤과 같은 신하가 있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로 인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탕은 걸왕을 멸하고 은나라를 세워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탕왕이 대업을 성취한 것이 이윤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탕 임금과 이윤이 화합하여 요순의 도를 받들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탕왕이 폭군 걸왕과 같이 이윤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폭정만을 일삼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탕왕 사후에도 계속된 그의 노력
그렇다면 과연 탕이 대업을 성취하는 데 있어 이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기에 하늘까지 감동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윤이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을 걱정하여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요순의 도를 따라 태평성대를 이루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그의 의로운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성품은 탕이 대업을 이룩한 뒤에도 한결같았다. 비록 탕이 대업을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 또한 대업성취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윤은 탕왕 사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군(主君)을 보좌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탕왕 사후 그가 보좌했던 두 임금〔(외병(外丙)ㆍ중임(中壬)〕은 건강상의 문제로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短命)하였다. 이에 이윤은 대신(大臣)들과 상의하여 탕왕의 손자(孫子)인 태갑(太甲)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태갑제(太甲帝)가 왕좌(王座)에 오른 지 3년 만에 나라의 법도는 무너지고 정사도 나날이 어지럽게만 되어갔다. 그는 탕왕이 만들어 놓은 법도마저 없애버리고 향락에만 빠져 점점 더 포악해져만 갔다. 이대로 태갑제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제2의 걸(桀)왕이 되어 나라를 망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이윤은 태갑제를 탕왕(湯王)의 묘가 있는 동궁(桐宮)으로 보내 회유케 했다. 이윤이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까닭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선대성군(堯·舜·禹·湯)으로부터 지켜진 태평성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은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이후에도 그에게 덕치를 실현한 우(禹)왕과 폭군 걸왕의 선례를 들며 왕으로서 지녀야할 덕을 훈계하였다. 하지만 태갑제는 이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귀찮게만 여겼는데, 이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태갑제를 반드시 어진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태갑제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찾아가 어진 임금들의 법도를 교화하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간언했다.이 같이 계속된 그의 노력으로 인해 마침내 태갑제는 동궁으로 간지 3년 만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에 이윤은 정권을 다시 태갑제에게 돌려주었고, 이윤의 간언으로 개과천선한 태갑제는 그의 훈계대로 성군들의 덕을 본받아 어진정치를 행했다.

천하사(天下事)를 위해 천도(天道)를 따른 이윤
이윤의 인품은 후대에도 칭송되었는데,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의 말을 참고하면, 이윤은 뛰어난 현자로서, 자신이 보좌하던 임금이 요순의 법도와 정사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를 자신의 탓으로 여겨 항상 자신을 책망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그것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마치 사람 많은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책망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윤은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겨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宰相)의 위치에서 늘 자신의 과부족을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한 그의 성품 때문인지 그가 생(生)을 마감한 뒤에도 그의 뜻을 높이여긴 사람들은 명재상 이윤이 뜻을 두었던 것에 뜻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실천한다면 누구나가 현자(賢者)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일생 동안 변치 않았던 ‘이윤의 뜻’이란,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위로는 임금을 도와 선대(先代) 성군(聖君)으로부터 이어져온 태평성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요순의 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뜻을 두고 이 일을 평생사명(平生使命)으로 여긴 이윤은 일생 동안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이윤은 사욕에 빠지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보좌했던 탕임금과 태갑제는 모두 성군(聖君)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덕성(德性) 때문인지 그는 임금에서부터 백성과 신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로부터 인망(人望)을 얻을 수 있었다.
상제님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이윤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신 까닭도 이윤의 이 같은 면모를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가 살았던 시국은 비록 난세(亂世)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늘 자신의 과부족이라 여기며 천하사에 임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자신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사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고, 그 마음을 임금과 백성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하늘의 법도〔天道〕와 다르지 않았기에 하늘도 그의 행실에 감동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상제님께서 그를 높이 여기신 이유도 아마 그가 평생을 사욕(私慾)에 얽매임 없이 천도(天道)를 따라 천하사에 임하여 자신의 책무를 완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지러운 난세에서 평생을 변치 않고 천도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수도인들도 이윤의 이 같은 성품을 본받아 일상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자신의 과부족을 살피고 이를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마음을 무욕청정하게 한 이후로는 이윤이 모든 것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뜻을 세우고 변치 않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였듯, 우리 수도인들도 양위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유법(遺法), 그리고 도전님의 유훈(遺訓)에 모든 것의 잣대를 두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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