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서경》은 요임금(堯, 기원전 2356년? ~ 기원전 2255년?[3])부터 주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시대까지 요(堯) · 순(舜)의 2제와 우왕(禹王) · 탕왕(湯王) ·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3왕들이 신하에게 당부하는 훈계와 군왕이 백성에게 내린 포고와 명령, 군왕에게 올린 신하의 진언, 전쟁을 앞두고 백성과 장병들에게 한 훈시, 대신들 사이의 대화 등을 담고 있다.
성립
《서경》은 3000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고문(古文) 25편, 금문(今文) 33편 등 58편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원본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문은 한나라 경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 벽에서 발견한 춘추시대의 문자체(진(晉)나라의 문자)로 씌여진 고본이고, 금문은 구전된 것을 한나라 문제 때 복생(伏生)이 당시 통용되던 예서로 정리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별차이가 없었다고 하나 이후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로 나뉘어 전수되었다. 고문상서는 동한 광무제 때 무성편이 서진 말기에 나머지 15편이 전부 없어졌고, 현재는 위고문상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공안국의 위고문상서는 동진 원제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위고문상서를 조정에 바쳐진 후 청나라 때까지 천여 년 동안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공안국 혹은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현행본 58편 가운데 이르바 '오고'라고 일컫는 대고, 강고, 주고, 소고, 낙고와 금등, 자재, 다사, 다방 등이 서경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성립이 된것으로 주나라 초기의 기록이라고 한다. 오고는 문체가 가장 난해하여 더 고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때 고요모에는 사상적으로 노장철학과 유가철학이 분화되지 않은 것도 옅보여 고오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5]
구성
《서경》은 모두 5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3편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부르고 나머지 25편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한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지만 일부를 분할하여 편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BC 4세기 이전에 작성된 진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문상서는 원래 16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오래전에 소실되었다. 4세기에 나타난 모작은 원본의 제목을 붙인 16편에 9편을 더하여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5편은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舜)의 말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6~9편은 하나라(夏,기원전 2205년경 ~ 기원전 1766년경)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몰락(기원전 1122년)에 대한 기록인데, 은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인 주왕이 타락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주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尙書
유교의 사서삼경 중에 하나로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왕들이 내린 포고문, 신하들의 상소, 왕의 연설문 등 각종 정치문헌을 모아둔 것이다.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대의 국가기록을 정리한 것이라 역사서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원래는 정치문헌들을 그냥 문서란 의미의 서(書)라고 불렀는데, 전한 시대에 유학이 국가이념이 되자 존중의 의미를 담아 상(尙)자를 붙여 상서라고 불렀다. 이후 송나라가 되면 삼경에 든다는 의미로 서경(書經)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이야기가 도는 물건이니, 당연히 분서갱유의 피해를 입어 대부분의 상서는 소실되었다. 진나라의 통치가 끝나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유학자들은 이를 학자들의 기억과 몰래 숨겨두었던 죽간에 의존해 복원했고, 한나라 때의 필체로 다시 기록하여 읽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서가 재구성된 이후 보급되어 읽히는 중에 문제가 생겼다. 공자가 살던 집을 헐어보니 벽 안에서 춘추전국시대 당대의 필체로 쓰인 상서의 죽간이 발견된 것. 이를 옛 글로 쓰인 것이라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라 불렀고, 분서갱유 이후 재구성한 것을 당시의 글로 쓰인 것이라 해서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불렀다.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내용면에서 차이가 있었고, 이후 고문을 지지하느냐 금문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파가 나뉘어 치열한 논쟁의 막이 올랐다.
그러던 중 위진시대에 와서는 고문상서는 아주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동진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고문상서를 찾아다 황제에게 올렸지만 내용의 진위문제로 인해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당나라때는 공영달(孔穎達)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면서 매색의 것을 토대로 금문과 고문을 모아 해석을 붙여 재구성하였는데, 이후 명나라 때 매작(梅鷟)과 청나라 떄 염약거(閻若璩)가 매색의 고문상서가 가짜임을 밝혔다. 매색의 고문상서는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 혹은 가짜 고문상서라고 부른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홍재전서 제93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경사강의(經史講義) 30 ○ 서경(書經) 1 신축년(1781)에 선발된 홍이건(洪履健), 홍인호(洪仁浩), 이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이종섭(李宗燮), 조윤대(曺允大), 이동직(李東稷), 이현묵(李顯默), 이익운(李益運), 박종정(朴宗正) 등이 답변한 것이다
[총론(總論)]
한대(漢代)에 이르러 육경(六經)에는 모두 사승(師承)이 있어 하나의 경전에도 제가(諸家)들의 책 또한 각기 달랐다. 예를 들면, 《주역(周易)》에는 세 가지, 《시경(詩經)》에는 네 가지, 《춘추(春秋)》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 유가 바로 이것인데, 자구(字句)의 많고 적음과 훈고(訓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경전의 전체로써 논한다면 일찍이 같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상서(尙書)》만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차이가 있는데, 하나는 28편이고 또 다른 하나는 58편이니, 이는 자구와 훈고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편장의 수가 거의 갑절이 된다.
이제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을 살펴보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다. 공안국(孔安國)이 왕명을 받아 《고문상서》의 전(傳)을 지은 것은 한 무제(漢武帝) 말엽이었는데, 이를 비부(祕府)에 올린 후 미처 반포, 간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책이 비부에 있었지만 외부인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한서(漢書)》와 《정의(正義)》는 도위조(都尉朝)로부터 아래로 매색(梅賾)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이 전수한 사람들을 대략 말하고 있으나 한대(漢代) 이후 여러 유학자들은 모두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상서》의 문장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나 모두가 《금문상서》일 뿐, 《고문상서》는 일찍이 쓰지 않았다. 조기(趙岐)의 《맹자(孟子)》 주해(註解), 고유(高誘)의 《여람(呂覽)》 주해, 두예(杜預)의 《좌전(左傳)》 주해에서는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편 안의 글에 대하여 모두 일서(逸書)라 말하였는데, 유독 《후한서(後漢書)》에서만은 “가규(賈逵)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이 모두 두림(杜林)에게서 《고문상서》를 얻어 주해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정의》에 실린 편목(篇目)을 살펴보면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은 일찍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복생(伏生)의 《금문상서》만을 취하여 일서(逸書) 100편의 편명을 뒤섞어 58편의 수효를 맞추었을 뿐이다. 이로 보면, 이 세 사람 역시 진짜 《고문상서》를 본 사람이 아니다.
허신(許愼)은 《설문(說文)》을 지으면서 “《서경》은 공씨(孔氏)의 것을 인용하였다.”고 말하였지만 이제 《설문》 12편에 인용된 《상서》의 자구(字句)를 살펴보면 모두가 《금문상서》일 뿐, 공안국의 《고문상서》는 한 글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허신 역시 《고문상서》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이는 한대 이후부터 영가(永嘉) 말엽에 이르기까지 명사와 석유(碩儒)들은 한 사람도 이를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천 년 동안 산일(散逸)되었던 책이 장강(長江) 남쪽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뒤 혼란한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점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진(晉) 나라 때 비부(祕府)에 《고문상서》가 있었다. 매색이 올린 것은 공안국의 전(傳)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두문자(科斗文字)로 쓴 책이 비부에 들어간 이후, 왕망(王莽)ㆍ동탁(董卓)ㆍ유석(劉石) 등의 난을 겪으면서 난대(蘭臺 한대(漢代) 궁 안에 있던 문고(文庫))에 소장된 서적들은 거의가 불타 버렸을 것인데, 칠서(漆書 옻칠한 대쪽에 쓴 책)와 죽간(竹簡)이 전쟁의 와중에 잘 보관되어 왔다고 하니, 이것을 어떻게 굳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의문점이다.
문체로 말하면, 복생의 문장은 까다롭지 않은 글이 없는데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편들은 하나같이 평이하다. 상서(商書)의 글은 평이한데 반경(盤庚)과 미자편(微子篇)은 읽기 어렵다. 그것이 곧 금문(今文)이다. 주서(周書)의 글은 읽기 어려운데도 태서(泰誓)와 무성(武成) 편은 평이하다. 또 이는 고문(古文)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의 차이가 있으나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을 합하여 살펴보면 문장과 자구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거슬림이 없으니, 이 또한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비록 그 문장이 《논어(論語)》ㆍ《맹자》ㆍ《좌전》ㆍ《국어(國語)》ㆍ《예기(禮記)》ㆍ《순자(荀子)》 등의 고문을 인용한 부분에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설령 위작한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널리 여러 서적을 고찰하여 편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의문점이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도 일찍이 이를 의심하여 “내 일찍이 공안국의 《상서》가 위서(僞書)라 의심해 왔다.” 하였고, 또 “공안국의 《상서》가 동진(東晉)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왔다. 그 이전의 유학자들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였고, 또 “《서경》에서 대체로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고문상서》이며, 읽기 난해한 것은 모두 《금문상서》이다.” 하였고, 또 “어떻게 수백 년 동안 벽 속에 소장된 책이 한 글자도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말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주자가 평소에 말한 논지를 대략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채침(蔡沈)의 《집전(集傳)》 서문에서 “이전(二典 요전(堯典)과 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는 일찍이 주자가 시정해 주었다.”고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주자가 여러 경전에 주석을 많이 썼고, 심지어는 《이소경(離騷經)》과 《참동계(參同契)》 유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상서》에 대해서는 유독 없는데, 또한 그 사이에 은미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인가?
만일 《상서》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면 어째서 하나의 변(辨)을 지어 위서임을 밝히지 않고 도리어 문인에게 《집전》을 짓도록 하였겠는가. 이제 만약 《고문상서》가 참으로 의심스러운 것이라면 대우모의 16글자와 태갑(太甲)ㆍ열명(說命)의 아름다운 말과 생각, 주관(周官)의 제도는 모두 허황한 것이 된다. 이는 성학(聖學)의 핵심이며 경학의 관문이다. 경학을 궁구하는 선비들은 반드시 널리 고찰하고 깊이 헤아린 것이 있을 것이니, 분명한 논을 듣고자 하는 바이다.
[이석하(李錫夏)가 대답하였다.]
《고문상서》에는 본디 의문점이 많으니, 첫째는 문체가 같지 않음이며 둘째는 전수(傳授)의 증거가 없다는 점인데, 이미 성상의 질문에서 모두 말씀하셨으므로 다시 언급할 것이 없으나 더욱 의심이 되는 것은 태사공이 “친히 《고문상서》를 공안국에게서 전수받았다.”고 말하였는데 《사기》에 인용한 탕고(湯誥)의 문장은 현재의 탕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사공이 보았을 다른 편 역시 오늘날 전해 오는 탕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즘 이른바 매색이 올렸다고 하는 것은 그 원류를 살펴보면, 매색은 장조(臧曹)에게서, 장조는 양유(梁柳)에게서, 양유는 소유(蘇愉)에게서, 소유는 정충(鄭沖)에게서 얻었다고 하며, 정충 이상은 전혀 사승(師承)이 없고, 마융ㆍ정현의 계통과는 중간에서 단절되었으니, 원래 도위조(都尉朝) 이하와 맥락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자 또한 일찍부터 자주 의심해 왔습니다.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타난 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삼가 주자의 평소 논지를 취하여 유별로 모아 깊이 궁구하여 보면 의심만 하였을 뿐, 일찍이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전(二典)과 대우모를 일찍이 시정하였고, 평소 해설을 힘쓰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재 채침의 《집전》의 문장은 주자의 설이 열에 일고여덟이니, 실제로는 주자의 《집전》인 셈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전의 주석에 널리 미쳤으나 《상서》에 미치지 않은 것은 겨를이 없었을 뿐이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마음속으로 그것이 위작임을 알고 착수하지 않으면서 문인에게 명하여 구차스럽게 해석하게 할 리 있겠습니까. 주자가 이 책을 높이 믿고 표장(表章)하였음을 이로 인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총론(總論)이다.
[주D-001]《상서(尙書)》 : 《서경(書經)》의 별칭이다. 《서경》은 상고(上古) 시대에 사관이 정사(政事)를 기록한 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선진(先秦) 이전에는 단순히 《서(書)》라 하였을 뿐, 《상서(尙書)》라 하지 않았다.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상서》라는 이름은 복생(伏生)으로부터 비롯하였다.” 하였다. 서(書) 위에 ‘상(尙)’ 자를 더한 명의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학설로 집약된다. 공안국(孔安國)은 “상고 시대의 서적이기 때문에 《상서》라 한다.” 하였고, 왕충(王充)은 “혹자는 《상서》에 대해 말하기를, ‘상(尙)이란 위를 말하니, 윗사람이 한 일을 아랫사람이 쓴 것이다.’ 한다.” 하였고, 정현(鄭玄)은 “상(尙)이란 ‘높이다’는 뜻이니, 하늘에서 내려 준 책처럼 존중해야 할 책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말 가운데 공안국의 말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國學導讀叢編 國學槪論》
[주D-002]금문(今文)과 …… 58편이니 : 본서에서는 금문과 고문 2종으로만 말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밖에 ‘위고문(僞古文)’도 있어, 일찍이 《상서》는 금문, 고문, 위고문 3종으로 전수되어 왔다. 금문은 한예(漢隸)로, 고문은 선진(先秦) 고전(古篆)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이는 문자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경의(經義)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고문과 금문 양파(兩派)로 나뉘어지고 있다. 《금문상서》는 모두 28편이며 복생(伏生)으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사기》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복생은 진시황 때 박사(博士)였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자, 복생은 벽 속에 책을 숨겨 놓았다가 한 나라가 평정되었을 때, 다시 그 책을 찾았으나 수십 편을 잃어버리고 29편만을 찾아 《상서》가 전해졌다.” 한다. 여기에서 말한 29편이란 고명(顧命) 1편을 고명과 강왕지고(康王之誥)로 나누어 2편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나누면 29편이 되고 고명과 강왕지고를 하나로 합하면 28편이 된다. 따라서 본서에서 말한 28편은 《금문상서》의 29편이다. 《고문상서》는 선진 고문자(古文子)로 쓰여진 것 2종을 말한다. 그 하나는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소장본으로 전수되지 못하여 한대(漢代)에 이미 잃어버렸고, 또 다른 하나는 공자의 집 벽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금문상서》에 비해 16편이 더 수록되어 있다. 이를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얻어 조정에 올렸으나 공안국이 무고(巫蠱)를 당함으로써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세칭(世稱) ‘공벽서(孔壁書)’ 《고문상서》이다. ‘위고문’은 《고문상서》의 위작으로 이 또한 2종이 있다. 하나는 서한(西漢)의 장패(張覇)가 지었다는 102편으로 이미 유실되어 전해 오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바친 《고문상서》 58편으로, 공안국의 전(傳)까지 함께 바쳤는데, 이 공안국의 전은 위작한 것이어서 엄격히 말하면 《상서》 위공전(僞孔傳)이다. 여기에서 말한 58편은 복생의 《금문상서》 29편을 33편으로 나누고 이에 위작된 25편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 통행되는 《상서》 위공전이다. 《國學導讀叢編 書經導讀》
[주D-003]과두문자(科斗文字) : 전자(篆字) 이전에 사용된 최고(最古)의 문자로, 글자의 획이 올챙이의 모양과 같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4]대우모의 16글자 :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말한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layout/contentsIframe.jsp;jsessionid=kwlTQtRckb138FnJ5JvDmhWTQFb7L23dqkXQ2G3pBcsx4dkpt1gK!236000499%3FbizName=MK%26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253FbizName=MK%2526seojiId=kc_mk_m007%2526gunchaId=av093%2526muncheId=01%2526finId=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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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 30 ○ 서경(書經) 1 신축년(1781)에 선발된 홍이건(洪履健), 홍인호(洪仁浩), 이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이종섭(李宗燮), 조윤대(曺允大), 이동직(李東稷), 이현묵(李顯默), 이익운(李益運), 박종정(朴宗正) 등이 답변한 것이다 |
[총론(總論)] |
한대(漢代)에 이르러 육경(六經)에는 모두 사승(師承)이 있어 하나의 경전에도 제가(諸家)들의 책 또한 각기 달랐다. 예를 들면, 《주역(周易)》에는 세 가지, 《시경(詩經)》에는 네 가지, 《춘추(春秋)》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 유가 바로 이것인데, 자구(字句)의 많고 적음과 훈고(訓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경전의 전체로써 논한다면 일찍이 같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상서(尙書)》만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차이가 있는데, 하나는 28편이고 또 다른 하나는 58편이니, 이는 자구와 훈고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편장의 수가 거의 갑절이 된다.
이제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을 살펴보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다. 공안국(孔安國)이 왕명을 받아 《고문상서》의 전(傳)을 지은 것은 한 무제(漢武帝) 말엽이었는데, 이를 비부(祕府)에 올린 후 미처 반포, 간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책이 비부에 있었지만 외부인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한서(漢書)》와 《정의(正義)》는 도위조(都尉朝)로부터 아래로 매색(梅賾)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이 전수한 사람들을 대략 말하고 있으나 한대(漢代) 이후 여러 유학자들은 모두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상서》의 문장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나 모두가 《금문상서》일 뿐, 《고문상서》는 일찍이 쓰지 않았다. 조기(趙岐)의 《맹자(孟子)》 주해(註解), 고유(高誘)의 《여람(呂覽)》 주해, 두예(杜預)의 《좌전(左傳)》 주해에서는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편 안의 글에 대하여 모두 일서(逸書)라 말하였는데, 유독 《후한서(後漢書)》에서만은 “가규(賈逵)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이 모두 두림(杜林)에게서 《고문상서》를 얻어 주해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정의》에 실린 편목(篇目)을 살펴보면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은 일찍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복생(伏生)의 《금문상서》만을 취하여 일서(逸書) 100편의 편명을 뒤섞어 58편의 수효를 맞추었을 뿐이다. 이로 보면, 이 세 사람 역시 진짜 《고문상서》를 본 사람이 아니다.
허신(許愼)은 《설문(說文)》을 지으면서 “《서경》은 공씨(孔氏)의 것을 인용하였다.”고 말하였지만 이제 《설문》 12편에 인용된 《상서》의 자구(字句)를 살펴보면 모두가 《금문상서》일 뿐, 공안국의 《고문상서》는 한 글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허신 역시 《고문상서》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이는 한대 이후부터 영가(永嘉) 말엽에 이르기까지 명사와 석유(碩儒)들은 한 사람도 이를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천 년 동안 산일(散逸)되었던 책이 장강(長江) 남쪽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뒤 혼란한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점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진(晉) 나라 때 비부(祕府)에 《고문상서》가 있었다. 매색이 올린 것은 공안국의 전(傳)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두문자(科斗文字)로 쓴 책이 비부에 들어간 이후, 왕망(王莽)ㆍ동탁(董卓)ㆍ유석(劉石) 등의 난을 겪으면서 난대(蘭臺 한대(漢代) 궁 안에 있던 문고(文庫))에 소장된 서적들은 거의가 불타 버렸을 것인데, 칠서(漆書 옻칠한 대쪽에 쓴 책)와 죽간(竹簡)이 전쟁의 와중에 잘 보관되어 왔다고 하니, 이것을 어떻게 굳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의문점이다.
문체로 말하면, 복생의 문장은 까다롭지 않은 글이 없는데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편들은 하나같이 평이하다. 상서(商書)의 글은 평이한데 반경(盤庚)과 미자편(微子篇)은 읽기 어렵다. 그것이 곧 금문(今文)이다. 주서(周書)의 글은 읽기 어려운데도 태서(泰誓)와 무성(武成) 편은 평이하다. 또 이는 고문(古文)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의 차이가 있으나 《고문상서》에 더 수록되어 있는 25편을 합하여 살펴보면 문장과 자구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거슬림이 없으니, 이 또한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비록 그 문장이 《논어(論語)》ㆍ《맹자》ㆍ《좌전》ㆍ《국어(國語)》ㆍ《예기(禮記)》ㆍ《순자(荀子)》 등의 고문을 인용한 부분에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설령 위작한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널리 여러 서적을 고찰하여 편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의문점이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도 일찍이 이를 의심하여 “내 일찍이 공안국의 《상서》가 위서(僞書)라 의심해 왔다.” 하였고, 또 “공안국의 《상서》가 동진(東晉)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왔다. 그 이전의 유학자들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였고, 또 “《서경》에서 대체로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고문상서》이며, 읽기 난해한 것은 모두 《금문상서》이다.” 하였고, 또 “어떻게 수백 년 동안 벽 속에 소장된 책이 한 글자도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말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주자가 평소에 말한 논지를 대략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채침(蔡沈)의 《집전(集傳)》 서문에서 “이전(二典 요전(堯典)과 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는 일찍이 주자가 시정해 주었다.”고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주자가 여러 경전에 주석을 많이 썼고, 심지어는 《이소경(離騷經)》과 《참동계(參同契)》 유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상서》에 대해서는 유독 없는데, 또한 그 사이에 은미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인가?
만일 《상서》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면 어째서 하나의 변(辨)을 지어 위서임을 밝히지 않고 도리어 문인에게 《집전》을 짓도록 하였겠는가. 이제 만약 《고문상서》가 참으로 의심스러운 것이라면 대우모의 16글자와 태갑(太甲)ㆍ열명(說命)의 아름다운 말과 생각, 주관(周官)의 제도는 모두 허황한 것이 된다. 이는 성학(聖學)의 핵심이며 경학의 관문이다. 경학을 궁구하는 선비들은 반드시 널리 고찰하고 깊이 헤아린 것이 있을 것이니, 분명한 논을 듣고자 하는 바이다.
[이석하(李錫夏)가 대답하였다.]
《고문상서》에는 본디 의문점이 많으니, 첫째는 문체가 같지 않음이며 둘째는 전수(傳授)의 증거가 없다는 점인데, 이미 성상의 질문에서 모두 말씀하셨으므로 다시 언급할 것이 없으나 더욱 의심이 되는 것은 태사공이 “친히 《고문상서》를 공안국에게서 전수받았다.”고 말하였는데 《사기》에 인용한 탕고(湯誥)의 문장은 현재의 탕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사공이 보았을 다른 편 역시 오늘날 전해 오는 탕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즘 이른바 매색이 올렸다고 하는 것은 그 원류를 살펴보면, 매색은 장조(臧曹)에게서, 장조는 양유(梁柳)에게서, 양유는 소유(蘇愉)에게서, 소유는 정충(鄭沖)에게서 얻었다고 하며, 정충 이상은 전혀 사승(師承)이 없고, 마융ㆍ정현의 계통과는 중간에서 단절되었으니, 원래 도위조(都尉朝) 이하와 맥락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자 또한 일찍부터 자주 의심해 왔습니다.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타난 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삼가 주자의 평소 논지를 취하여 유별로 모아 깊이 궁구하여 보면 의심만 하였을 뿐, 일찍이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전(二典)과 대우모를 일찍이 시정하였고, 평소 해설을 힘쓰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재 채침의 《집전》의 문장은 주자의 설이 열에 일고여덟이니, 실제로는 주자의 《집전》인 셈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전의 주석에 널리 미쳤으나 《상서》에 미치지 않은 것은 겨를이 없었을 뿐이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마음속으로 그것이 위작임을 알고 착수하지 않으면서 문인에게 명하여 구차스럽게 해석하게 할 리 있겠습니까. 주자가 이 책을 높이 믿고 표장(表章)하였음을 이로 인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문상서》에는 본디 의문점이 많으니, 첫째는 문체가 같지 않음이며 둘째는 전수(傳授)의 증거가 없다는 점인데, 이미 성상의 질문에서 모두 말씀하셨으므로 다시 언급할 것이 없으나 더욱 의심이 되는 것은 태사공이 “친히 《고문상서》를 공안국에게서 전수받았다.”고 말하였는데 《사기》에 인용한 탕고(湯誥)의 문장은 현재의 탕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사공이 보았을 다른 편 역시 오늘날 전해 오는 탕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즘 이른바 매색이 올렸다고 하는 것은 그 원류를 살펴보면, 매색은 장조(臧曹)에게서, 장조는 양유(梁柳)에게서, 양유는 소유(蘇愉)에게서, 소유는 정충(鄭沖)에게서 얻었다고 하며, 정충 이상은 전혀 사승(師承)이 없고, 마융ㆍ정현의 계통과는 중간에서 단절되었으니, 원래 도위조(都尉朝) 이하와 맥락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자 또한 일찍부터 자주 의심해 왔습니다.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타난 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삼가 주자의 평소 논지를 취하여 유별로 모아 깊이 궁구하여 보면 의심만 하였을 뿐, 일찍이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전(二典)과 대우모를 일찍이 시정하였고, 평소 해설을 힘쓰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재 채침의 《집전》의 문장은 주자의 설이 열에 일고여덟이니, 실제로는 주자의 《집전》인 셈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전의 주석에 널리 미쳤으나 《상서》에 미치지 않은 것은 겨를이 없었을 뿐이지,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마음속으로 그것이 위작임을 알고 착수하지 않으면서 문인에게 명하여 구차스럽게 해석하게 할 리 있겠습니까. 주자가 이 책을 높이 믿고 표장(表章)하였음을 이로 인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총론(總論)이다.
[주D-001]《상서(尙書)》 : 《서경(書經)》의 별칭이다. 《서경》은 상고(上古) 시대에 사관이 정사(政事)를 기록한 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선진(先秦) 이전에는 단순히 《서(書)》라 하였을 뿐, 《상서(尙書)》라 하지 않았다.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상서》라는 이름은 복생(伏生)으로부터 비롯하였다.” 하였다. 서(書) 위에 ‘상(尙)’ 자를 더한 명의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학설로 집약된다. 공안국(孔安國)은 “상고 시대의 서적이기 때문에 《상서》라 한다.” 하였고, 왕충(王充)은 “혹자는 《상서》에 대해 말하기를, ‘상(尙)이란 위를 말하니, 윗사람이 한 일을 아랫사람이 쓴 것이다.’ 한다.” 하였고, 정현(鄭玄)은 “상(尙)이란 ‘높이다’는 뜻이니, 하늘에서 내려 준 책처럼 존중해야 할 책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말 가운데 공안국의 말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國學導讀叢編 國學槪論》
[주D-002]금문(今文)과 …… 58편이니 : 본서에서는 금문과 고문 2종으로만 말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밖에 ‘위고문(僞古文)’도 있어, 일찍이 《상서》는 금문, 고문, 위고문 3종으로 전수되어 왔다. 금문은 한예(漢隸)로, 고문은 선진(先秦) 고전(古篆)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이는 문자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경의(經義)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고문과 금문 양파(兩派)로 나뉘어지고 있다. 《금문상서》는 모두 28편이며 복생(伏生)으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사기》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복생은 진시황 때 박사(博士)였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자, 복생은 벽 속에 책을 숨겨 놓았다가 한 나라가 평정되었을 때, 다시 그 책을 찾았으나 수십 편을 잃어버리고 29편만을 찾아 《상서》가 전해졌다.” 한다. 여기에서 말한 29편이란 고명(顧命) 1편을 고명과 강왕지고(康王之誥)로 나누어 2편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나누면 29편이 되고 고명과 강왕지고를 하나로 합하면 28편이 된다. 따라서 본서에서 말한 28편은 《금문상서》의 29편이다. 《고문상서》는 선진 고문자(古文子)로 쓰여진 것 2종을 말한다. 그 하나는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소장본으로 전수되지 못하여 한대(漢代)에 이미 잃어버렸고, 또 다른 하나는 공자의 집 벽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금문상서》에 비해 16편이 더 수록되어 있다. 이를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얻어 조정에 올렸으나 공안국이 무고(巫蠱)를 당함으로써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세칭(世稱) ‘공벽서(孔壁書)’ 《고문상서》이다. ‘위고문’은 《고문상서》의 위작으로 이 또한 2종이 있다. 하나는 서한(西漢)의 장패(張覇)가 지었다는 102편으로 이미 유실되어 전해 오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바친 《고문상서》 58편으로, 공안국의 전(傳)까지 함께 바쳤는데, 이 공안국의 전은 위작한 것이어서 엄격히 말하면 《상서》 위공전(僞孔傳)이다. 여기에서 말한 58편은 복생의 《금문상서》 29편을 33편으로 나누고 이에 위작된 25편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 통행되는 《상서》 위공전이다. 《國學導讀叢編 書經導讀》
[주D-003]과두문자(科斗文字) : 전자(篆字) 이전에 사용된 최고(最古)의 문자로, 글자의 획이 올챙이의 모양과 같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4]대우모의 16글자 :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말한다.
[주D-002]금문(今文)과 …… 58편이니 : 본서에서는 금문과 고문 2종으로만 말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밖에 ‘위고문(僞古文)’도 있어, 일찍이 《상서》는 금문, 고문, 위고문 3종으로 전수되어 왔다. 금문은 한예(漢隸)로, 고문은 선진(先秦) 고전(古篆)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이는 문자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경의(經義)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고문과 금문 양파(兩派)로 나뉘어지고 있다. 《금문상서》는 모두 28편이며 복생(伏生)으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사기》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복생은 진시황 때 박사(博士)였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자, 복생은 벽 속에 책을 숨겨 놓았다가 한 나라가 평정되었을 때, 다시 그 책을 찾았으나 수십 편을 잃어버리고 29편만을 찾아 《상서》가 전해졌다.” 한다. 여기에서 말한 29편이란 고명(顧命) 1편을 고명과 강왕지고(康王之誥)로 나누어 2편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나누면 29편이 되고 고명과 강왕지고를 하나로 합하면 28편이 된다. 따라서 본서에서 말한 28편은 《금문상서》의 29편이다. 《고문상서》는 선진 고문자(古文子)로 쓰여진 것 2종을 말한다. 그 하나는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소장본으로 전수되지 못하여 한대(漢代)에 이미 잃어버렸고, 또 다른 하나는 공자의 집 벽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금문상서》에 비해 16편이 더 수록되어 있다. 이를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얻어 조정에 올렸으나 공안국이 무고(巫蠱)를 당함으로써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세칭(世稱) ‘공벽서(孔壁書)’ 《고문상서》이다. ‘위고문’은 《고문상서》의 위작으로 이 또한 2종이 있다. 하나는 서한(西漢)의 장패(張覇)가 지었다는 102편으로 이미 유실되어 전해 오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바친 《고문상서》 58편으로, 공안국의 전(傳)까지 함께 바쳤는데, 이 공안국의 전은 위작한 것이어서 엄격히 말하면 《상서》 위공전(僞孔傳)이다. 여기에서 말한 58편은 복생의 《금문상서》 29편을 33편으로 나누고 이에 위작된 25편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 통행되는 《상서》 위공전이다. 《國學導讀叢編 書經導讀》
[주D-003]과두문자(科斗文字) : 전자(篆字) 이전에 사용된 최고(最古)의 문자로, 글자의 획이 올챙이의 모양과 같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4]대우모의 16글자 :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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