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뉴스 논쟁 2: 저널리즘의 몰락
스타 기자 출신으로 현재는 교수로 활동 중인 제네바 오버홀저(Geneva Overholser 2005)는 “우리가 알고 있던 저널리즘은 끝났다”는 표현으로 저널리즘의 위기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뉴욕타임즈를 중심으로 미디어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데이비드 카(David Carr 2007)는 “역사가는 미국 역사에서 아마도 지금을 저널리즘이 사라지는 시기로 기록할 수 있을지를 검토할 것이다”며 쇠퇴의 길로 접어든 저널리즘에 대한 진혼곡을 애처롭게 부르고 있다.
저널리즘 몰락의 소용돌이
이들이 말하는 ‘저널리즘 위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윤율이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는 언론사의 수익성 악화를 말하는 것일까? 한국일보 사태와 같이 사주가 편집권을 당당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침해하는 경우를 위기라 불러야 할까? 이집트, 이란, 베트남, 러시아 등에서 기자 또는 블로거가 정부 비판 목소리만으로 어두운 감옥으로 끌려가는 억압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저널리즘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하며 그리고 공정한 보도를 추구하는 이른바 ‘독립 언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부패지수‘에서 언론은 최근 가장 큰 신뢰도 하락 폭을 기록하고 있다. 독립 언론이 빛바랜 슬로건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은 교육계보다 언론계가 더 부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39쪽).
이런 사실들에서 저널리즘의 위기를 추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독한 열병처럼 전 세계 언론에 빠르게 번지고 있는 저널리즘 위기는 비민주적 정치 및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출구를 찾기 어려운 경제 위기에도 살아남는 기업이 있다지만, 언론산업에 들이닥친 한파는 ‘종이신문’을 버릴 때에만 물러나는 도도하고 오만스러운 선전포고와 같다.
저널리즘 1차 위기: 디지털 전환 실패
여전히 종이신문의 전통 아래 놓여 있는 저널리즘은 세 가지 영역에서 압력을 받고 있다.
첫 번째 압력은 젊은 독자 대다수가 인터넷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신문 읽기를 권장하려는 절망에 가까운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인터넷으로 떠난 독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종이신문의 매력은 교과서에서나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
두 번째 압력은 독자와 함께 광고주도 종이신문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잠시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어떤 근거에 기초해서 언론사 경영진은 ‘인터넷 신문(internet newspaper)’이라는 유별난 공간에 값비싼 종이 위에 인쇄된 기사를 처음부터 무료로 공급했을까?
기사의 무료 공급은 경제적 합리성을 쉽게 찾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버블이라는 신기루 현상에 취해 헛된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언론사 경영진은 무료 기사를 미끼로 더 많은 독자들을 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독자가 있는 곳에 광고주도 함께한다. 독자 수 또는 클릭 수로 협소하게 이해된 방문자 수는 언론사가 광고주에게 과시할 수 있는 매체 영향력으로 동시에 광고 효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사 경영진은 여기서 결정적인 판단 착오를 한 것이다. 인터넷은 종이신문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경쟁 공간’이다. 전 세계 언론(1차 뉴스 플랫폼)이 몇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도착할 수 있는 땅이다. 뉴스 선별 및 중개를 담당하는 다양한 유형의 2차 뉴스플랫폼이 만들어졌고, 인기를 얻었으며 이용자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리고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언론사가 종이신문을 통해 고이 품어 왔던 광고주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만난 물고기가 되어 다른 경쟁자의 품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 품이 네이버이며 다음이다. 더욱 큰 대자연의 품이 구글이고 페이스북이다. 광고주에게 이러한 경쟁 강화는 너무나 멋진 세상이다. 헨리 포드는 종이신문과 잡지의 광고효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광고에 쓰는 예산의 절반은 (효과를 측정할 수 없기에) 낭비에 불과하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낭비에 해당하는 예산 절반이) 어느 쪽 절반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종이매체와는 달리 인터넷 기반 광고기술의 진화는 광고주에게 광고 효율성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 때문에 언론사는 참담한 패배자의 심정으로 자신의 품을 떠난 자식들을 바라볼 뿐이다. 최근 뉴욕타임즈, 가디언 등이 광고주를 설득하기 위해 광고기술 개발에 막대한 재정투자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한국 언론사와 달리 영미 및 유럽 언론사의 경우 광고매출 하락은 더욱 심각하다. 이른바 구인, 부고, 중고차, 부동산, 데이팅 등 안내광고(Classified advertising) 시장의 변화가 영미 및 유럽 언론사를 처참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미국 종이신문의 안내광고 총매출은 약 2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런데 200억 달러의 종이신문 안내광고 시장은 2012년 약 45억 달러로 크게 축소되었다(Newspaper Association of America 2012, 2013). 여기서 2000년 당시 안내광고 시장 매출이 미국 종이신문 전체 매출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개닛(Gannett)과 뉴육타임즈의 현재 주식 가치가 당시와 비교하면 1/1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저널리즘이 받고 있는 세 번째 압력은 2차 뉴스플랫폼의 활성화에 따른 개별 언론사의 의제 설정 능력의 급격한 상실에 기인한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 뉴스 서비스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꺼질 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통한 뉴스 중개 경향도 조금씩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다.
온라인 뉴스 시장에서 2차 뉴스플랫폼은 결코 기형아가 아니다. 기사의 원자화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이며 중개의 무한한 가능성은 월드와이드웹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나아가 인터넷에서 발생하고 있는 뉴스 유통 및 뉴스 소비 과정의 변화는 인터넷에서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과 전달되는 과정이 변한 것과 관련 있다. 백과사전 편집자가 지식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네이버, 다음, 구글 등 검색서비스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거대한 목록(index)에 담아내고 있다. 검색서비스에 의한 지식의 목록화는 지식 구성에 있어 결정적 변화를 함께 가져온다.
근대화 및 산업화 시기에 정보와 사실은 전문가로 구성된 기관(institution)에 의해 검증되는 과정을 거쳐 옳고 그름이 가려졌다. 정보 및 사실이 가지는 의미가 탐구된다. 그리고 그 의미가 지식, 진실, 규범, 원칙, 공리 등으로 인정받는 과정과 그 결과물을 ‘카논(canon)’이라고 불린다. 종이신문을 생산하는 언론사는 기자와 편집인으로 구성된 하나의 ‘기관’이며, 정기적으로 생산되는 종이신문 그 자체는 하나의 ‘카논’이라 칭할 수 있다.
사실과 정보가 전문가에 의해 정제되고 선별되는 과정이 ‘카논’을 의미한다면, 이와 반대로 검색서비스는 사실과 정보가 엄청나게 큰 목록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목소리의 합창’과 같다. 검색 알고리즘은 특정 질문에 대해 하나의 의무적인 답변이나 웹사이트를 제시하지 않는다. 특정 질문에 서로 경쟁하는 복수의 결과 값이 제시되고, 이용자 개인은 결과 값 중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함께 결정한다.
인터넷에서 하나의 사실이 진설성을 얻게 되는 과정은, 외부 기관이 아닌 복수의 동료 전문가에게 평가받는 방식인 동료평가(Peer Review)의 확장된 형태다. 동료평가처럼 여전히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인터넷에서 하나의 진술, 정보 및 뉴스는 서로 다른 판단력에 근거한 다양한 평가를 거쳐 사실과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무한에 가까운 복수의 행위에 기초한 지식 형성과정은, 일찍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이야기한 것처럼, “다양한 관점을 가진 복수의 사람들에 의해 조명받는 과정에서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 때문에 검색서비스와 2차 뉴스플랫폼은 인터넷 시대에 사실 및 뉴스가 지식 및 진실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돕는 중요한 도구다. 그리고 검색서비스와 2차 뉴스플랫폼이라는 인터넷의 지식 도구는 다양한 비판과 혁신의 영향을 받으며 새롭게 태어나고 진화하고 있다. 개별 목소리(웹 페이지) 및 개별 뉴스의 집합체 및 합창은 인터넷에서 목록(index) 형식으로 제공되며, 이러한 인터넷 지식의 질서는 언제나 임시적인 상태라는 특징을 가진다. 특정 사실에 대한 새로운 목소리 및 새로운 뉴스가 이용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목록에 등장한다. 이 목록은 특정 질문에 대한 진실을 규정하지 않고 다만 이용자에게 방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결국, 무엇이 유효한지를 판단하는 것과 목록의 개별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이용자 자신의 몫이다. 나아가 인터넷을 통한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의 합창과 다원주의는 지식의 민주화를 일정 수준 가능케 하고 있다. 지식의 민주화 만큼 기관, 특히 개별 언론사의 지식 결정력 및 의제 설정 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언론사의 의제 설정 능력 상실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의한 구조적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저널리즘 2차 위기: 기자와 정보원의 공생관계
경제 및 금융 전문기자 출신인 미국의 안야 쉬프린(Anya Schiffrin)은 2010년 “나쁜 뉴스: 어떻게 미국 경제지는 세기의 사건 보도를 망쳤는가 (Bad News: How America’s Business Press Missed the Story of the Century)”라는 책을 대표 집필한다. 여기서 ‘나쁜 뉴스’라 함은 역설적이게도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는 뉴스를 말한다. 당돌한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2008년 전후에 일어난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와 관련하여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저널리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며 쉬프린의 남편인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이 책에서 당시 비판적 언론 하나만 있었어도 투기 거품을 일으켰던 집단적 광기를 막을 수 있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세계 금융위기 이전에 비판적 언론이 단 하나만이라도 존재했다면, 그 비판적 언론에 의한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 이뤄졌다면, 현실과 연관성을 상실한 (금융) 시장이 건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며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Stiglitz 2011, 24-26).
또한 같은 책에서 딘 스타크맨(Dean Starkman)은 2000년 초반부터 2007년 중순까지 미국의 9개 경제지의 기사내용을 분석했다. 스타크맨에 따르면 9개 언론사의 기사 중 총 730개의 기사가 경제위기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같은 기간 동안 생산한 기사의 수가 약 220,000개에 이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730개는 턱없이 부족하다. 스타크맨의 표현을 빌리자면, “홍보(PR)자료에 기초한 기사(“좋은 뉴스 Good News”)의 홍수에 비교한다면 730개의 비판 기사(“나쁜 뉴스 Bad News”)의 양은 ……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에 흐르는 한 개의 코르크 마개와 같다”(Starkman 2011, 43).
그 때문에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담당할 비판언론의 존재는 스티클리츠에게는 단지 희망 사항일 수밖에 없다. “기자라고 사회 다른 편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 위기 이전에는 기자들은 스스로 투자 거품 속으로 들어갔고, 거품이 터진 이후에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었다”(Stiglitz 2011, 24).
여기서 스티글리치는, 기자와 정보원 또는 기자와 홍보(PR)담당의 공생관계를 현대 저널리즘의 가장 큰 위협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 미국 언론사의 편집국은 이른바 ‘카더라’식 보도(he said, she said reporting)에 빠져있다. 또한, 기자 및 편집국의 분석이 빠진 상태로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는 것을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보도라고 생각하는 것도 ‘카더라’식 보도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색맹인 기자가 하늘의 색채가 파랗다고 믿는 사람에게 ‘하늘은 오렌지색이야’라고 주장하는 다른 목소리를 전달하면서 기자 스스로 중립적이고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널리즘 스스로 신뢰도를 붕괴시키는 행위다(Stiglitz 2011, 30).
더구나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저널리즘의 신뢰도를 붕괴시키는 새로운 위험요소가 등장했다. 비판 기능과 분석 능력이 축소된 저널리즘의 틈 사이를 돈과 전문능력으로 무장한 홍보 전문가가 비집고 들어서고 있다. 특히 블로그, SNS 등 소셜 미디어 홍보 및 마케팅이 확산하면서 정부, 기업, 그리고 시민단체 등은 온라인 홍보에 적지 않은 규모의 투자를 진행해 왔다. 정부 및 기업의 목소리가 언론의 기고문 형식으로 공중에게 전달되면서 언론사에는 작은 규모지만 새로운 수익이 발생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기고문은 저널리즘의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고 있다. 더욱이 클릭 몇 번만으로 보도자료가 저널리즘으로 둔갑하는 일들이 일상화되고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정부, 기업 및 시민단체는 온라인을 통해 공중과 만나는 기회가 확대하고 있어 높은 비용이 드는 광고, 기고문, 보도자료보다는 공중과 직접적인 소통을 확대하고 있다.
인터넷은 언론사 사이의 경쟁을 확대해 ‘뉴스의 공급과잉’을 낳았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언론사의 중재를 반드시 필요로 했던 정부, 기업, 시민단체가 홍보 콘텐츠의 대량 생산을 통해 언론과 직접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경쟁 과잉으로 인한 언론사의 수익성 악화는 저널리즘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고, 언론사의 비용 절감은 사전조사 생략, 하루 기사 생산량 증가 압력 등 저널리즘을 악화시킨다. 질적 저하를 겪고 있는 저널리즘은 높은 투자를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홍보전문가와 경쟁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있다. 저널리즘 몰락의 소용돌이가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물론 ‘카더라’식 보도가 장마철 한강물처럼 넘쳐나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때론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며 때론 마음을 일으켜 세워 몸을 광장으로 이끄는 언론 보도가 존재한다. 이러한 값진 보도와 기사가 점차 열악해지는 경제 환경 및 편집국 환경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저널리즘이 처한 이러한 역설은 연구자들이 간간이 제기해온 언론 신뢰도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사회적 반향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Franklin 2008, 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
저널리즘의 위기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매력적인 문장이 기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이 아니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가혹한 해고 또는 편집국 폐쇄에도 흔들리지 않는 멋진 기자들이 우리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정치적 경향을 떠나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기획기사로 둔갑한 홍보 기사가 넘쳐날 때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홍보처의 보도자료를 받아적는 기자가 한두 명씩 늘어날 때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기자 한 명이 하루에 3개 많게는 4개의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노동 강도를 피할 수 없을 때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연예인 사진 한장 한장이 개별 기사가 되어 네이버 및 다음에 노출될 때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포털의 인기 검색어를 따라잡기 위해 기자의 노동현장이 이른바 ‘우라까이’(기사 베끼기)지옥으로 전락한 때다.
전 세계적으로 특히 한국사회에서 저널리즘은 멸종 위기 종이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널리즘을 가리키며 ‘저널리즘의 아름다운 복권’을 주장하는 것은, 신음하며 절망하며 눈물을 삼키며 하루하루 거친 노동을 견디고 있는 절대다수의 기자를 보지 못하는 행복한 낭만일 수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이야기하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저널리즘은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석 3: 언론 공정성의 과잉
‘포털 뉴스 논쟁 1: 포털은 저널리즘의 주체인가’에서 살펴본 것 처럼, 언론의 공정성 개념은 기술의 발전 그리고 정치 및 경제 환경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신문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생산기술 및 유통기술의 진화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대중신문’과 ‘보도’라는 새로운 뉴스양식의 출현이 가능해 졌다. 같은 배경에서 언론의 객관성 및 공정성 규범이 생겨났다. 데이비드 카(David Carr 2013)가 훌륭하게 정리하고 있듯이 저널리즘에서 “정치적 의도없는 정보(Information absent a political agenda)” 또는 독립 언론(indepedent press)에 대한 추구는 언론의 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한편 20세기 북미 및 유럽에서 형성된 일련의 저널리즘 규범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이론은 막스 베버의 가치중립(Wertfreiheit, value-freedom) 및 객관성 요구다. 가치중립이라는 표현은, 막스 베버가 1904년 발표한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의 객관성(‘Objectivity’ in Social Science and Social Policy)’이라는 논문에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베버의 가치중립 요구는 언론의 공정성, 중립성, 객관성, 불편부당성 등 다양한 저널리즘 규범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베버의 이론은 아도르노를 통해 거센 비판은 만나게 된다. 지난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지속한 실증주의 논쟁에서 아도르노는, 비정치적인 자세는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가치중립은 지배적인 가치체계에 복종하는 행위이며 비판의 중단을 의미한다(Adorno et al. 1969, 71-75). 한편 아도르노에게 있어 특정 가치를 강조하는 가치지향(value-orientation)과 가치중립은 동전의 양면이다. 왜냐하면, 가치중립 또한 특정 가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value)라는 단어는 두 개의 구별되는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다양한 재화에 대한 교환척도 및 비교척도로서 가치다. 여기서 재화의 가치는 생산비용 또는 기대효용을 통해서 결정되며 가격을 통해 표현된다. 두 번째 가치는 이상(ideal)의 다른 표현이다. 가치는 개인, 문화 또는 사회와 관련된 특별한 의미 또는 규범과 관련된 의미를 통해 만들어진다. 첫 번째 가치가 경제 가치 또는 교환 가치 등에 사용된다면, 두 번째 가치 개념은 가치 판단(value judgement), 정서적 가치(sentimental value) 등으로 쓰여진다.
아도르노로 잠시 돌아가 보자. 아도르노에 따르면 베버의 가치 중립 개념은 1900년도를 전후하여 맑스의 가치 이론에 대항하는 반론으로 탄생했다. 베버의 가치 개념은 재화의 생산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와 거리는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버에게 있어 가치는 사회적인 비교 척도이며 교환 척도이다. 이를 통해 (사회적 및 정치적) 입장, 행동, 행위자 등에 대한 가치 평가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러한 가치 평가에는 다양한 가치의 사회적 생산 및 배분에 있어 어떠한 가치 척도를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다.
또한 19세기를 경과하면서 경제학에서 교환가능한 재화의 비교 수단으로서 가치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면, 동시에 가치철학(axiology, value theory)이 발전하였다. 가치 철학은,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그 판단의 척도를 순수한 감정으로 부터 창조하려고 시도한다. 한편 가치 철학의 발전은 가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어느정도 상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와 유사한 흐름을 저널리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이 프리즘(PRISM)을 폭로하는 과정을 함께한 영국 가디언 블로거 글렌 그린왈드(Gleen Greenwald)의 역할과 관련된 논쟁에서 주류언론은 기자가 가져야할 가치 판단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스노든의 행위는 국가기밀을 폭로하는 불법행위이며, 그린왈드는 보도 과정에서 스노든을 (개인적으로) 돕는 정치행위를 통해 기자의 규범 또는 저널리즘의 규범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미국 주류언론의 비판이다. 또한 그린왈드와 관련된 저널리즘 정체성 논쟁에서 미국 주류언론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립 언론’의 가치가 중요하며 때문에 언론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절실함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저널리즘 위기와 관련된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관심, 다시 말해 저널리즘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생산과 배분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저널리즘의 가치 논쟁으로 둔갑한다.
현재 네이버 및 포털의 뉴스서비스의 가치 논쟁 또한 위의 흐름들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개별 언론사가 온라인에서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 등 저널리즘 가치의 문제가 포털 뉴스서비스에 의한 공정성 훼손 주장, 공정한 여론 형성을 위한 포털 뉴스서비스 중단 요구 등 저널리즘의 가치의 문제로 둔갑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이 활력있게 생겨나고 흐르는 민주주의, 언론의 공정성 등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가치가 경제적 교환관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면, 또 다른 한편으론 저널리즘의 가치를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조금 등 국가(=국민)의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거나 네이버에게 과거 뉴스캐스트가 선사했던 트래픽 축복을 요청하고 있다면, 저널리즘을 재화로 인식하고 저널리즘의 생산과 연관된 가치를 솔직하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널리즘이 위기를 넘어 몰락으로 이이지고 있는 이 때, 저널리즘의 가치를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법이 절실하다. 인터넷 뉴스시장에서는 저널리즘의 생산비용-공급-과 기대효용-소비- 사이에 가격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저널리즘이 재화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를 통해 시장에서 지속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격형성 방안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저널리즘의 시장 가치를 회복시키는 시점이 늦어지면 늦어질 수록, 저널리즘의 가치 주장은 더욱 더 현실성을 상실하며 정치적 해결을 모색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이 현재 겪고 있는 암울한 질곡은 가치에 관한 사회적 합의 및 학술적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저널리즘에게 시급한 것은 재화로서의 가치를 시장논리를 존중하는 가운데 시급하게 회복하는 것이다.
네이버 및 다음의 뉴스서비스가 사라진다면 한국 저널리즘이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언론사 경영진, 관료, 정치인이 존재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점에 멋진 말과 빠른 말로 마차가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를 이길 수 있다는 마음과 같다.
포털뉴스 논쟁 (목차)
상황과 함의
상황 1: 조중동 vs. 연합뉴스 + 네이버·다음
상황 2: 네이버 뉴스캐스트 vs. 네이버 뉴스스탠드
상황 3: 포털 뉴스편집의 공정성 논쟁, 이른바 ‘볼드체 시비’
상황 4: 네이버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다
상황 2: 네이버 뉴스캐스트 vs. 네이버 뉴스스탠드
상황 3: 포털 뉴스편집의 공정성 논쟁, 이른바 ‘볼드체 시비’
상황 4: 네이버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다
디지털 저널리즘과 디지털 시장
분석 1: 대중매체와 공정성의 탄생, 기술과 저널리즘
분석 2: 생산 중심 1차 언론과 중개 중심 2차 언론
분석 2: 생산 중심 1차 언론과 중개 중심 2차 언론
– 여기까지 [포털뉴스 논쟁 1: 포털은 저널리즘의 주체인가]
- 저널리즘 몰락의 소용돌이
- 저널리즘 1차 위기: 디지털 전환 실패
- 저널리즘 2차 위기: 기자와 정보원의 공생관계
- 저널리즘 1차 위기: 디지털 전환 실패
- 저널리즘 2차 위기: 기자와 정보원의 공생관계
분석 3: 언론 공정성의 과잉
— 여기까지 [포털뉴스 논쟁 2: 저널리즘의 몰락]
분석 4: 투명성과 구글뉴스 순위 알고리즘
- 디지털 시대, 늘어난 뉴스의 유통기한
- 뉴스소비 방식의 변화와 편향성
- 뉴스소비 방식의 변화와 편향성
– 여기까지 [포털뉴스 논쟁 3: 포털의 사회적 책무와 '감히 현명해지려는 용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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