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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31일 목요일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성의(誠意) 1절(1節) 중용 천명지위성장 상절(中庸天命之謂性章上節)]

심경집의(心經集義) 제2권(卷之二) 경(經)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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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誠意) 1절(1節)
[중용 천명지위성장 상절(中庸天命之謂性章上節)]

《중용》에,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 도라는 것은 잠깐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지 아니하는 데서 경계하며 삼가하고 그 듣지 아니하는 데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보다 더 보이는 것이 없으며 미세(微細)한 것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하느니라.” 하였다.
《대학(大學)》에, “이른바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라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이 하며 좋은 색을 좋아함과 같이 하는 이것을 스스로 쾌하다 하는 것[自謙]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는 삼가하느니라. 소인이 혼자 있을 때에는 착하지 않은 짓을 함이 이르지 않음이 없다가 군자를 보면 시치미를 떼고 그 착하지 않은 것을 감추고 그 착한 것을 나타내나, 사람들이 그를 볼 때에 폐간(肺肝)을 보는 듯하니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이것은 속에서 정성스러우면 밖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한다.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열 눈의 보는 바이며 열 손의 가리키는 바이니 엄하도다.’ 하였다. 부(富)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나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하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나니라.” 하였다.
《전습록(傳習錄)》에, “조금이라도 협잡이 있기 시작하면 문득 좋은 색을 좋아하며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마음이 아니다.” 하였고, 또 “조금이라도 딴 생각이 걸렸으면 곧 반드시 성인이 되려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집의(集義) 이윤(伊尹)이 함유일덕(咸有一德 《서경》 편명)을 지어 이르기를, “덕이 한결같으면 움직이는 것이 길(吉)하지 아니함이 없고 덕이 두 가지, 세 가지면 움직임이 흉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결같아야 이에 날로 새로워진다.” 하였다. 상서(商書)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착함에 순수하지 못하고 인욕(人欲)이 섞이어 착함에 항상하지 못하여 인욕이 간단(間斷)시키면 그 덕이 두 가지, 세 가지로 되어 움직임이 흉한 것이 아님이 없다. 《주역》에, “날로 새로움으로써 성(盛)한 덕이라.” 하였는데,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사람의 학(學)이 날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물러간다. 그러므로 덕은 날로 새롭게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날로 새롭게 못하는 자는 한결같지 못함이 방해한 까닭이다.” 하였다. 또 함유일덕(咸有一德)에 이르기를, “덕은 항상한 스승이 없고 착함을 주(主)하는 것이 스승이 되며 착함은 항상한 주(主)함이 없고 능히 한결같이 하는 데에 맞춘다.” 하였다. 아래에 보인다.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가 인(仁)을 버리면 무엇으로 이름을 이루리오. 군자는 밥 한 끼 먹을 동안에도 인을 어기지 못할 것이니, 창졸한 때에도 반드시 이(是 인(仁))에 하며, 엎어질 때에도 반드시 이에 할지니라.” 하였다. 이인(里仁)
정자가 말하기를, “공자가 이익[利]을 드물게 말하는 것은 다만 재리(財利)의 이(利)만이 아니라 무릇 이(利)할 마음이 있으면 곧 불가(不可)하니 한 가지 일을 하는 데에 모름지기 자기의 편리한 것을 찾음이 모두 이심(利心)이다. 성인은 의(義)로써 이(利)를 삼아서 의(義)의 편안한 곳이 곧 이(利)가 되는 것이다.” 석씨(釋氏)의 학은 모두 이(利)에 근본하였으므로 곧 옳지 않은 것이다.
○ 맹자가, 순(舜)과 도척(盜跖)의 분별을 말하는 데 다만 의(義)와 이(利)와의 사이에 있다 하였다. 사이라는 말은 서로 심히 멀지 않은 것으로서 틀리는 것이 털끝만하다는 것이다. 의와 이는 다만 공(公)과 사(私)일 뿐이다. 겨우 의에서 벗어나면 곧 이(利)로써 말하는 것이니 다만 계교(計較)함이 곧 이해(利害)가 있음이 된다. 만약 이해(利害)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계교하랴. 이해라는 것은 천하의 보통 생각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피한다. 성인은 다시 이해를 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의(義)에 당연히 할 것과 아니할 것을 보나니 곧 명(命)이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남당공(南贛公)이 말하기를, “진실로 다하지 못한[不盡] 마음이 없으면 스스로 난처할 일이 없다.” 하였다.
정자가 말하기를, “현자(賢者)는 오직 의를 알 뿐이니, 명(命)이 그 가운데 있고 중인(中人) 이하는 명(命)으로써 의(義)에 처한다. 현자 같으면 도로써 구하며 의로써 얻고 명을 반드시 말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사람이 환란(患難)에 있어서는 다만 한 가지의 처치가 있으니 사람의 계책을 다한 뒤에 모름지기 태연히 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만나면 마음과 마음, 생각과 생각에 놓지를 못하나니 필경에 무슨 유익함이 되는가? 만약 처치하고는 내버릴 줄을 모르면 곧 이것은 의가 없고 명(命)이 없다는 것이다.
○ 문인(門人)이 고향에 돌아가 향거(鄕擧)를 보려는 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고향에 가서 응시(應試)하는 것이 합격하기에 쉽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선생이 이르기를, “너의 이 마음이 벌써 요순(堯舜)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겠다. 대저 자공의 높은 식견으로 어찌 재리(財利)에 규규하였을까마는 다만 넉넉하고 부족한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요, 또 가난함과 부자됨이 명이 있는 것인데, 그가 그사이에 마음을 두었으니 도를 믿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인이 그를, 명을 순하게 받지 아니한다고 하셨으니, 도에 뜻을 둔 자는 마땅히 이 마음을 버린 뒤에라야 더불어 도를 말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 사람이 진실로 아침에 도를 듣고는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는 뜻이 있으면 하루라도 편안히 하지 못할 곳에 즐거이 편안히 하려고 않는 것이다. 어찌 하루뿐이랴! 잠깐도 되지 않는 것이 증자(曾子)가 대자리를 바꾸어 까는 것[易簣]같은 것이 그렇게 하여야만 편안히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와 같이 못하는 이는 다만 실리(實理)를 보지 못한 것이다. 실리라는 것은 실지로 옳은 것을 보고 실지로 그른 것을 본 것이다. 무릇 실리를 마음에 얻은 것은 자별(自別)하니 귀로 듣기만 하고 입으로 말하기만 하는 자는 마음으로는 실로 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실로 보았다면 반드시 편안히 하지 못할 바에 즐거이 편안히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에 얻는 것을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억지로 힘쓰기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러나 학자는 모름지기 억지로 힘써야 할 것이다. 옛사람이 몸을 죽이는 자고 있으니 만약 실지로 보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리오. 모름지기 실지로 사는 것이 의보다 중하지 아니하고 사는 것이 죽음보다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이가 있으니 다만 한 개의 옳은 것을 성취할 뿐이다.
집의(集義) 《대학》에, “군자가 큰 도가 있으니 반드시 충신을 얻고 교만함과 방종함을 잃느니라.” 하였다.
공자가 이르기를, “충신(忠信)을 주(主)하며 자기와 같지 아니한 자와 벗하지 말 것이니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아니할 것이니라.” 하였다.
○ 공자가 이르기를, “제자(弟子)가 들어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고 삼가하고 신실하며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仁)한 이를 친할 것이니, 행실을 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문(文)을 배울지니라.”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날로 내 몸을 세 번 반성하노니 남을 위해 인을 꾀하는데 충(忠)하지 못했는가? 벗으로 더불어 사귀는데 신(信)하지 못했는가? 스승의 전(傳)한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였다.
○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해도 친해지지 아니하거든 나의 인(仁)에 돌이켜 보며, 사람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아니하거든 나의 지(智)에 돌이켜 보며, 사람에게 예(禮)를 하여도 답하지 아니하거든 나의 공경함에 돌이켜 보라. 행하여 얻지 못함이 있거든 모두 자기에 돌이켜 볼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자는 인(仁)으로써 마음을 존(存)하며 예(禮)로써 마음을 존한다.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보아서 내가 반드시 인(仁)하지 못하였구나 반드시 예가 없었구나 또 내가 반드시 충신(忠信)하지 못하였구나 하여 인(仁)이 아니면 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것이니라.” 하였다. 이루(離婁) 상(上) 하(下)
《상서(商書)》 주관(周官)에, “지위는 교만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며 녹(祿)은 사치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공손함과 검소함이 오직 덕이니, 너의 거짓을 하지 말라. 덕을 지으면 마음이 편안하여 날로 아름답고 거짓을 지으면 마음이 괴로워서 날로 졸(拙)하니라.”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공손한 자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검소한 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아니하니 공손과 검소를 어찌 음성과 웃는 얼굴로 할 것이냐?” 하였다. 《시(詩)》 소민(小旻)에, “전전(戰戰)하며 긍긍(兢兢)하여 깊은 못에 다다름과 같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같이 하라.” 하였다. 《상서(商書)》 군아(君牙)에, “마음이 걱정되고 위태로움이 범의 꼬리를 밟는 것같이 하며 봄 얼음을 건너는 것같이 하라.” 하였다.
집의(集義) 만장의 물음에 대하여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의 말에 ‘중도(中道)인 사람을 얻지 못할진댄 반드시 광(狂)한 자와 견(狷)한 자일진져! 광(狂)한 자는 진취(進取)하고 견(狷)한 자는 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 뜻이 고상하고 커서 옛사람 옛사람 하지마는 그 행실을 상고해 보면 말을 덮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의 말에, ‘나의 문전을 지나면 들어오지 않아도 내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는 오직 향원(鄕愿)이다. 향원은 덕의 도적이다’ 하셨느니라.” 하였다. “어떤 것을 향원이라 합니까?” 하니, “어찌 그다지 고상하고 커서 말이 행실을 돌아보지 못하고 행실이 말을 돌아보지 못하면서 말로는 옛사람 옛사람 한다. 그러나 행실은 어찌 외롭게 살리오. 이 세상에 나서 이 세상 사람이 되어서 착하다 하면 된다 하여 가만히 사람들에게 기쁨을 사기만 하는 것이 이것이 향원이다.” 하였다. 만장(萬章)이 말하기를, “한 고을 사람이 모두 향원 사람이 이르면 간 데마다 근신한 사람이 되지 않음이 없는데 공자는, ‘향원은 덕의 도적이다.’ 함은 어쩐 까닭입니까?” 하니, “그르다 하려 해도 지적할 거리가 없으며 나무라려 하여도 나무랄 것이 없어 시속에 혼동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하여 거(居)하는 것은 충신(忠信)한 것 같고 행하는 것은 청렴하고 깨끗한 것 같다. 여러 사람이 다 좋아하게 하여 스스로 옳다고 하나 요순(堯舜)의 도에 더불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덕의 도적이라 할 것이다. 군자는 정상(正常)한 데로 돌이킬 뿐이니 정상하게 되면 뭇 백성이 흥기되고 뭇 백성이 흥기되면 사특(邪慝)함이 없느니라.” 하였다. 진심(盡心) 하(下)
맹자가 말하기를,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능히 천승(千乘)의 나라를 사양하되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한 바구니의 밥과 한 그릇의 국에도 안색에 나타내느니라.” 하였다. 진심(盡心) 하(下) 또 말하기를, “중자(仲子)는 불의(不義)한 것이라면 제국(齊國)을 주어도 받지 않을 것을 사람들이 다 믿으나 이것은 한 바구니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사양하는 작은 의(義)다. 그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믿는다면 어찌 옳겠는가?” 하였다. 진심(盡心) 상(上)
정자가 말하기를, “학이란 모름지기 실지를 힘써서 이름에 가깝지 아니하여야 바야흐로 옳은 것이다. 이름을 가까이 할 뜻이 있으면 이것은 거짓이다. 큰 근본이 이미 잃어졌는데 다시 무슨 일을 배우랴. 이름을 위하는 것이 이익을 위하는 것과 맑고 탁한 것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이심(利心)은 한 가지이다.” 하였다.
진서(秦誓)에 이르기를, “만약 한 개의 신하가 진실하여 다른 재주는 없어도 그 마음이 넓어서 남의 재주 있는 것을 자기가 가진 것같이 생각하고 남의 아름답고 어진 것을 그 마음에 좋아하기를 자기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생각할 뿐이 아닌 이가 있으면 실로 능히 용납하여 능히 나의 백성과 자손을 보존할 것이니 거의 이익이 있으리라. 사람의 재주 있는 것을 질투하여 미워하고 남의 아름답고 어진 것을 어기어서 통하지 못하게 하면 실로 용납하여, 우리 자손과 백성을 또한 보전할 것이니, 또한 위태롭다.” 하였다. 주서(周書) 《대학(大學)》 명도선생이 한 가지 착한 것으로써 이름을 이루지 아니하고 일시의 이로움으로써 자기의 공을 삼지 아니하였다. 아래에 나온다.

[주D-001]증자(曾子)가 대자리를 바꾸어 까는 것[易簣] : 증자(曾子)가 병이 중할 때에 깔았던 대자리[簣]를 바꾸라 하였다. 그것은 계손(季孫)에게서 선사를 받은 것인데, 너무 화려한 자리였다.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병이 위중하시니 지금은 변동할 수 없고 내일 아침에나 바꾸겠습니다.” 하니, 증자는 “나는 무엇을 구하겠는가? 바르게 죽으면 그만이다.” 하고 자리를 바꾸자 곧 운명하였다.
[주D-002]중자(仲子) : 오릉중자(於陵仲子)인데 청렴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주D-003]불의(不義)한 것이라면 …… 작은 의(義)다. : 《맹자》의 본문에는 이 사이에 “그러나 중자가 형의 밥을 불의(不義)한 밥이라고 먹지 않고 어머니를 피하여 아내와 함께 오릉(於陵)에 가서 사는 것은 인륜(人倫)에 큰 죄를 얻은 것이니” 하는 구절이 있다.
[주D-004]진서(秦誓)에 이르기를, …… 위태롭다.” 하였다. : 《대학》에서 주서를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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