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가 전후 한국 자유주의의 출발점이라면 그 흐름은 너무 짧게 5.16에 의해 단절되었다. 60년대 그 정신이 문학과 예술영역에서 일부 숨쉬고 있었을지라도 대중적인 문화현상으로서 표현되지는 못했다. 군사정권하의 억압된 사회분위기 하에서 자유주의적 흐름은 서양 팝음악 구체적으로는 미국 포크음악의 이입으로 대중화되었다. 통기타문화로 대변되는 70년대 초의 대중문화현상은 미니스커트, 장발규제 등의 초 억압적 정권하에서 대학청년문화를 중심으로 한 저항의 문화를 자유의 바람으로 일깨웠다.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젊...음의 자유와 저항, 개성의 발산과 표현의 자유로써 나타났고, 정권은 금지곡과 대마초사건으로 그 흐름을 압살하였다.
그래서 한국 자유주의의 대중화와 생활로서의 전개는 통기타음악으로 대표되는 70년대의 모던 포크적 대중음악 흐름이 본격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 순수한 음악적 정열 조차 우리의 현실에서는 수용키 어려웠다. 80년대 민중음악은 이에대한 또다른 저항으로써 시작되었고, 상업적 대중음악의 영역은 저항운동에서 배제되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체가 우리시대 진보의 정치적 한계라는 생각마저 들지만, 하여튼 그 시기에 대학에서 상업음악에 대한 경멸은 자신의 감성을 키워온 밑바닥을 떼어내어야 하는 단절의 경험이기도 했다. 세시봉과 트윈폴리오 특집을 보면서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아픈 감성의 교착들을 맛보아야 했던 것은 개인적인 경험들이 기억나서였다.
개인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이러한 음악 흐름에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크리스마스 카드를 팔아서 어렵게 기타를 마련하였다. 그 시절 동네친구 따라서 기타학원에 흘끔거리고 쫓아가보고 나서, 악보와 코드를 베껴가며 기타를 배웠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은 콧수염 기른 같은 반의 팝음악 대가(?)께서 퀸과 비틀즈 등을 강의하면 열심히 쫗아듣고, 시험 끝나면 철길 건어서 지하철 타고 함께 인천의 극장들을 헤멨던 기억도 난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 조금 늦게 어떤 이념 써클로 가입하면서 술자리였다. 신입회원 부터 노래를 부르라는 강권에 송창식의 노래를 열심히 불러댔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냉소적이랄까 꽁꽁 얼어버린 느낌에, 나 스스로 노래를 끝까지 부르기도 어색하였다. 그 당시 대학가는 초기 민중음악의 형성기였고, 기존 상업적 대중음악에 대한 경멸들이 팽배하였다. 자연스레 나 스스로도 그러한 낭만적 감성들을 죄스럽게 느끼면서 의식의 저편으로 내려 눌러야 했다. 낭만적 감성들로 이겨내기에 현실은 너무 냉엄하고 억압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1년 쯤 후에는 나 자신도 그런 순수한 감성들을 지닌 후배들을 골치아프게 생각하고 의식의 변화에 몰두하었다.
하여튼 그러한 결과는 내 가슴 속의 허전함과 팍팍함으로, 내 생활의 무미건조함과 강퍅함을 남겨 놓았다. 어느날 집으로 올라가던 고갯 길에서 괴물스럽게 메말라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고선 너무나 슬펐다. 풍부한 종교적 깊이, 포괄적 감성의 수용 등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인생은 비틀어진 고목같이 자의식만으로 견뎌내야 했었다.
아무튼 이번 세시봉 설특집을 보면서 그런 이런 저런 기억들이 되살아 났다. 그것이 우리 사회 자유주의의 대중적 현상이었다는 자각과 아울러, 이제는 그처럼 쉽게 단절해버리고 쉽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권리와 인권과 자유와 기본적 제도들이 아직도 우리사회의 기초에서 어떤 측면에서는 해방적 기운으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그 미시적 흐름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자각떄문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는 아직 우리 옆에서 여전히 진행형이고 좀 더 건강한 자유주의의 활성화를 필요로하는 경우도 많다. 진보적 자유주의란 이런 건강한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논한 어느 이론가 처럼, 오늘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가 달성코자하는 이상의 목표를 추구해야 하기 떄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들로 아쉬움과 애정들이 교차되면서 지난 시절의 우리시대 자유주의의 경험으로 세시봉 특집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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