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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5일 토요일

세시봉 특집 - 70년대 자유주의의 경험 ]

  4.19가 전후 한국 자유주의의 출발점이라면 그 흐름은 너무 짧게 5.16에 의해 단절되었다. 60년대 그 정신이 문학과 예술영역에서 일부 숨쉬고 있었을지라도 대중적인 문화현상으로서 표현되지는 못했다. 군사정권하의 억압된 사회분위기 하에서 자유주의적 흐름은 서양 팝음악 구체적으로는 미국 포크음악의 이입으로 대중화되었다. 통기타문화로 대변되는 70년대 초의 대중문화현상은 미니스커트, 장발규제 등의 초 억압적 정권하에서 대학청년문화를 중심으로 한 저항의 문화를 자유의 바람으로 일깨웠다.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젊...음의 자유와 저항, 개성의 발산과 표현의 자유로써 나타났고, 정권은 금지곡과 대마초사건으로 그 흐름을 압살하였다.
그래서 한국 자유주의의 대중화와 생활로서의 전개는 통기타음악으로 대표되는 70년대의 모던 포크적 대중음악 흐름이 본격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 순수한 음악적 정열 조차 우리의 현실에서는 수용키 어려웠다. 80년대 민중음악은 이에대한 또다른 저항으로써 시작되었고, 상업적 대중음악의 영역은 저항운동에서 배제되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체가 우리시대 진보의 정치적 한계라는 생각마저 들지만, 하여튼 그 시기에 대학에서 상업음악에 대한 경멸은 자신의 감성을 키워온 밑바닥을 떼어내어야 하는 단절의 경험이기도 했다. 세시봉과 트윈폴리오 특집을 보면서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아픈 감성의 교착들을 맛보아야 했던 것은 개인적인 경험들이 기억나서였다.

개인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이러한 음악 흐름에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크리스마스 카드를 팔아서 어렵게 기타를 마련하였다. 그 시절 동네친구 따라서 기타학원에 흘끔거리고 쫓아가보고 나서, 악보와 코드를 베껴가며 기타를 배웠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은 콧수염 기른 같은 반의 팝음악 대가(?)께서 퀸과 비틀즈 등을 강의하면 열심히 쫗아듣고, 시험 끝나면 철길 건어서 지하철 타고 함께 인천의 극장들을 헤멨던 기억도 난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 조금 늦게 어떤 이념 써클로 가입하면서 술자리였다. 신입회원 부터 노래를 부르라는 강권에 송창식의 노래를 열심히 불러댔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냉소적이랄까 꽁꽁 얼어버린 느낌에, 나 스스로 노래를 끝까지 부르기도 어색하였다. 그 당시 대학가는 초기 민중음악의 형성기였고, 기존 상업적 대중음악에 대한 경멸들이 팽배하였다. 자연스레 나 스스로도 그러한 낭만적 감성들을 죄스럽게 느끼면서 의식의 저편으로 내려 눌러야 했다. 낭만적 감성들로 이겨내기에 현실은 너무 냉엄하고 억압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1년 쯤 후에는 나 자신도 그런 순수한 감성들을 지닌 후배들을 골치아프게 생각하고 의식의 변화에 몰두하었다.
하여튼 그러한 결과는 내 가슴 속의 허전함과 팍팍함으로, 내 생활의 무미건조함과 강퍅함을 남겨 놓았다. 어느날 집으로 올라가던 고갯 길에서 괴물스럽게 메말라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고선 너무나 슬펐다. 풍부한 종교적 깊이, 포괄적 감성의 수용 등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인생은 비틀어진 고목같이 자의식만으로 견뎌내야 했었다.

아무튼 이번 세시봉 설특집을 보면서 그런 이런 저런 기억들이 되살아 났다. 그것이 우리 사회 자유주의의 대중적 현상이었다는 자각과 아울러, 이제는 그처럼 쉽게 단절해버리고 쉽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권리와 인권과 자유와 기본적 제도들이 아직도 우리사회의 기초에서 어떤 측면에서는 해방적 기운으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그 미시적 흐름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자각떄문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는 아직 우리 옆에서 여전히 진행형이고 좀 더 건강한 자유주의의 활성화를 필요로하는 경우도 많다. 진보적 자유주의란 이런 건강한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논한 어느 이론가 처럼, 오늘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가 달성코자하는 이상의 목표를 추구해야 하기 떄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들로 아쉬움과 애정들이 교차되면서 지난 시절의 우리시대 자유주의의 경험으로 세시봉 특집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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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스피어 - 한국의 현실

http://cimio.net/617
얼마전 이정환님의 블로그에 보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언론인 1위로 블로거이자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2위로 허핑턴 포스트라는 팀블로그 형태의 사이트를 창업한 아리아나 허핑턴이 뽑히는 등, 25명의 중요 언론인 중 블로그 관련자가 5명에 이를 정도로 블로그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글이 올라왔더군요. 역시 미국에서 블로그는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 전통적인 TV 방송국이나 신문사 만큼이나 중요한 주류사회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전설적인 테크 칼럼니스트인 데이빗 포그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세스 고딘 등도 열심히 블로그를 운영할 뿐 아니라, 이들의 블로그가 엄청난 독자를 확보하였다는 사실을 봐도 블로그의 주류 진입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과 비교하면, 한국의 블로고스피어는 참으로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것이 2007년말부터인데, 1년 반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더 후퇴하면 후퇴했지, 크게 발전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는 곧 전국민이 블로그를 만들고, 스타 블로거는 외국 처럼 엄청난 수익을 얻는 시대가 오리라는 흥분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블로그는 하나의 틈새 영역(niche)이 되어 버렸기에 일반인은 블로그를 생소해하는 분위기고, 블로그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도 2008년초까지는 다음 블로거뉴스에 송고해서 베스트도 여러 번 뽑히고 해서 잘 알지만, 하루에 만 명씩 찾아오는 블로그도 한달에 광고 수익 30만원 벌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 천 명 찾아오는 정도로는 생활비는 커녕 용돈도 안나온다는 뜻이죠. 그러니 "전업 블로거"는 미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물론 블로거로 인기를 끌고, 이를 바탕으로 책을 내거나 강의를 해서 생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블로그 운영이 아닌, 작가와 강사로 생활비를 버는 것이기에 "전업 블로거"라고 하기가 어렵겠죠.)

블로고스피어의 침체는 한국적 인터넷 환경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미국은 기업가가 새로운 흐름에 맞는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주류 언론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일반인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창의성을 살려 인기를 끌고, 이는 좋은 컨텐츠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져 더욱 사용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을 보입니다. 짧은 글을 쉽게 올리는 트위터라는 서비스가 생겨나고, CNN 등 주류 언론이 이를 받아들여 트위터로 소식을 전하고, 일반인 사용자들 중에서도 트위터를 통해 재치있는 글을 올리는 사람이 늘고, 이처럼 주류 언론과 적극적인 일반인 사용자가 늘면서 트위터에 등록하면 흥미로운 짧은 글을 많이 접할 수 있기에 갈수록 사용자가 늘어나는 것은 이러한 좋은 예입니다. 페이스북이나 flickr 등도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성공을 거두었죠.

그에 비해, 한국은 대부분의 서비스가 미국 서비스의 한국판 개념으로 시작하기에 독창성이 없고, 서비스를 시작해도 주류 회사나 언론이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려고 하지 않고, 일반인 중에서라도 이러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사람이 적고, 이처럼 주도적 사용자들이 적으니 컨텐츠가 쌓이지 않고, 결국 일반인들은 실망해서 서비스 이용을 포기하고 마는 악순환이 자주 발생합니다. 블로그도 미국에서 나온 개념을 한국에서 받아들인 예인데, 일단 블로그가 관심의 대상이 된 후에도 조중동이나 KBS, MBC, SBS 등 주류 언론은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자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해 생색만 내면서 공짜 컨텐츠를 얻는 전략을 썼고, 일반인은 처음엔 조금 호기심을 느꼈지만 블로그 방문자 수도 많지 않고 광고 수익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열심히 운영하는 사람이 늘지 않았고, 이렇게 해서 좋은 블로그 컨텐츠가 많이 생산되지 않자 블로그에 대한 관심도 줄고, 블로고스피어 자체도 위축되어버렸죠.

한때 많은 공공기관, 기업이 블로그 도입에 관심을 보였지만, 한국 문화에서 주류 조직이 블로그를 운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블로그는 아무나 찾아와 블로거와 댓글로 소통하는, 참으로 평등한 매체인데(그에 비해 신문은 읽고 난 후 기자나 편집자에게 즉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일방적 매체이죠), 주류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블로그를 통해 찌질한 댓글을 달지도 모르는 익명의 다수를 만나기를 꺼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류 기업가나 언론인 중에서 제대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죠. 게다가, 모 언론사의 대기자는 자신의 칼럼에 대해선 댓글도 못달게 막아놓을 정도로 "나는 잘났으니 너네는 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말을 듣지 않겠다"는 식의 권위주의가 아직도 지배하는 한국의 언론계 특성상, 노벨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이 악플러와 싸우며 블로그를 운영하는 미국의 모습은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죠.

물론 한국에도 박경철님이나 이찬진님 처럼 사회적으로 유명하면서 블로그도 제대로 운영하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사실은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싸이월드는 흥미롭게도 미국의 인터넷 서비스가 성공한 과정을 그대로 밟았다는 점(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보다 먼저 나온 Social Network 서비스->유명인들도 미니홈피를 개설->일반인도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활동->대부분의 사람이 싸이를 하니 싸이의 유용성이 커지면서 결국 큰 인기)에서 중요한 예입니다. 즉, 싸이월드는 한국에서도 주류 사회와 일반인 적극 활동가의 참여로 인해 성공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셈이죠.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는 말은 하드웨어와 통신망을 기준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받아들이는 마인드와 컨텐츠의 양과 질을 따져보면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라기엔 매우 부족한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사용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새로운 서비스가 많이 나오고, 주류 사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서비스의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일반인이 늘어야 한국도 서비스 부족, 컨텐츠 부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